[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03>

  • 입력 2009년 5월 28일 12시 41분


[건조한 방송, 땀에 젖은 로봇]

<보노보> 방송국은 '배틀원 2049' 개막과 함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국제대회 중계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경기장 분위기를 스케치하고, 편집하고, 방송을 송출하는데 시행착오가 많았다. 자막에 기계어가 표기되는가 하면, 현장과의 연결도 매끄럽지 못했다.

아침마다 열리는 국장급 조찬 회의에서 사장 찰스는 세 번 째 다리로 테이블을 투웅 치며 화를 냈다.

"조마조마해서 도저히 우리 방송 못 보겠어! 진행이 왜 그렇게 어설퍼?"

영문학자이자 미디어 사상가 마샬 맥루한은 일찍이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했다. 모든 매체는 메시지의 내용과 상관없이, 감각기관의 확장으로서,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감정 없는 로봇들이 운영하는 <보노보>를 통해 전 지구로 전파되는 '배틀원 2049' 중계는 더없이 건조했다. 경기 현장의 뜨거운 분위기를 담지 못한 탓이다.

'배틀원 2049'가 '지구전'이기 때문에 <보노보>의 중계 상황을 더 어렵게 했다. 내년에는 '우주전' 형식으로 치러질 예정인데, <보노보>로서는 관람객이 훨씬 적은 우주공간에서 로봇들의 하이테크 격투를 중계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 그러나 올해 방송중계를 훌륭히 마쳐야 '배틀원 2050'의 '공식 중계업체'로 선정될 수 있기 때문에, 찰스는 연일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중계 도중에 광고가 너무 많다'는 지적이 계속 들어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광고국장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한 경기당 15초 유닛 열두 개, 30초 유닛 여덟 개를 배분하지 않았나? 그럼 7분밖에 안 되는데, 그게 뭐가 많다는 거야! 광고 단가를 세 배쯤 높이게 해주든가. 안 그러면 손익분기점도 못 맞춰."

"열 개 이상 광고가 3-4분간 계속 나오는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1-2분씩이면 상대적으로 덜한데, 3-4분간 연이어 나오니까 더 지루하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지난 주 로봇 시청자들 반응은 어때? '보노보 프라임 뉴스' 사고에 대해 별다른 얘긴 없어?"

찰스가 다그치듯 물었다. 경기 현장의 기자와 연결이 끊어졌을 때, 앨리슨 쿠퍼 앵커는 그저 "다시 한 번, 현장을 연결해 보겠습니다"라는 말만 일곱 번이나 반복했다. 20세기 말, '전설의 앵커' 앨리슨 쿠퍼라면 도저히 저지르지 않을 실수였다. 그 밤 <보노보> 방송국으로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로봇 시청자들은 별다른 지적사항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뉴스에 담긴 정보량이 너무 적다는 불만을 나타냈습니다."

"제발! 좀! 매끄럽게 진행해. 나, 열 받게 만들지 말고."

언론이 '데스 매치'를 집중 조명했기 때문에, '개인전'이나 '단체전'을 찾는 관람객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데스 매치'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개인전'은 육상경기를 연상시키는 운동기술을 선보이는 '운동 부문'과 최첨단 로봇 기술을 선보이는 '기술 부문', 그리고 음악에 맞춰 댄스를 선보이는 '댄스 부문'으로 나뉜다.

운동 부문에는 12미터를 높이 올랐다가 무사히 착지하는 '높이뛰기', 50미터를 이족보행으로 질주하는 기록경기 '달리기', 10초 동안 일곱 바퀴 이상 빠르게 회전해야 하는 '연속 회전' 등이 있다.

기술 부문에는 등이 바닥에 닿지 않고 세 바퀴 회전하는 '턴 어라운드'(turn-around)와 로봇이 자동차(vehicle) 모양으로 바꿔 10미터 이동한 뒤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와야 하는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이 대표적인 시합방식이다. '트랜스포메이션' 부문은 로봇 관련 기업이 가장 눈독을 들이기로 유명하다. 이 부문 우승팀과 후원회사는 '자동차 기술이 직접 적용될 수 있는 로봇공학 분야'의 최전선에 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 관람객에게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은 단연 '댄스 부문'이다. 올해는 마흔여섯 팀이나 참가했으며, 저마다 다양한 노래에 맞춰 화려한 댄스를 선보이고 있다.

단체전은 일본의 전통적인 민족경기 '스모'를 연상시킨다. 이족보행 로봇 다섯 대가 가로세로 길이 10미터 링 안에서 밀거나 쓰러뜨려 상대로봇을 밖으로 밀쳐내는 경기로, 마지막까지 남는 로봇이 승리한다. 두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채 들거나 던져 밖으로 밀어내면 반칙이고, 때리거나 팔다리를 부수는 것도 금지사항이다. 반드시 밀거나 쓰러뜨려 끌고 나가야 한다.

단체전 역시 인기가 만만치 않다. 화려한 디자인의 로봇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 밀쳐내는 경기로 올해 총 스물두 팀이 참가했다.

2049년 7월 1일 오후 8시. '보노보 프라임 뉴스'가 시작되자, 댄디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봇 앵커 앨리슨 쿠퍼가 오프닝 멘트를 멋지게 날렸다.

"마르셀 푸르스트가 남긴 명언으로 오늘 시작합니다.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저는 지난 몇 주간 여러분들이 매일같이 오갔을 상암동 로봇격투기 전용경기장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는 법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 동안 데스 매치가 열리는 제 3 경기장과 제 4 경기장만 찾으셨죠? 앞으로는 제 1 경기장과 제 2 경기장에서 색다른 즐거움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개인전'과 '단체전' 본선 '2 라운드'가 펼쳐지거든요. 현장에 나가있는 빈센트 노호 기자를 불러보겠습니다. 빈센트 노호 기자?"

대답이 없다. 앨리슨 쿠퍼가 다시 현장 연결을 시도했다.

"현장에 나가있는 빈센트 노호 기자를 불러보겠습니다. 빈센트 노호 기자?"

이번에도 침묵만 이어졌다. 사장실에서 뉴스를 보고 있을 찰스의 손바닥도 땀에 절었을 것이다.

"현장에 나가있는 빈센트 노호 기자를 불러보겠습니다. 빈센트 노호 기자?"

세 번째. 잠시 잡음만 흐르다가, 현장 카메라와 연결된 제 4 번 모니터에 화면이 뜨면서 빈센트 노호 기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 여기는 상암동 제 2 경기장입니다."

뉴스룸 밖에서 한숨과 함께 옅은 웃음이 터졌다. 로봇 피디들은 당연히 긴장감과 안도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매우 적절해 보였다.

"빈센트 노호 기자, 지금 상암동 경기장 분위기를 전해주시지요."

"네, 이곳에서는 현재 단체전 2라운드 경기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올해는 스물두 팀이 예선을 뚫고 본선에 참가를 했는데요, 다섯 팀이 한 조가 되어 두 팀을 선발하고요, 두 팀이 부전승으로 합류해서 열 팀이 본선 2라운드를 통과하게 됩니다. 특히 작년도 단체전 우승로봇인 니산의 '시라후지 겐타 5'(교토, 우승확률: 26/100)가 올해도 놀라운 실력을 발휘해서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또 눈여겨 볼만한 로봇선수는 누가 있나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신경공학팀이 만든 파워 식스팩 K-350 (패서디나, 우승확률: 12/100)도 두 손에 '레이놀드 압축엔진'을 장착해 상대방을 완벽하게 붙잡은 후 질질 끌고나가는 방식을 세계최초로 사용하고 있어 쉽지 않은 상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또 서울 SAIST 기계공학과에서 제작한 'SNP 5000'(서울, 우승확률: 8/100) 역시 두 팔로 상대를 바닥에 눕히고 암바를 걸어 링 밖으로 끌고 나가는 새로운 기술을 선보여 관람객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내일부터 벌어질 본선 3라운드에서는 열 팀이 둘로 나뉘어져 경기를 치르고, 두 경기의 승자가 마지막 결승전을 치르게 됩니다. 여러분의 많은 기대와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앨리슨 쿠퍼는 경기 현장을 세 번 만에, 무사히,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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