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04>

  • 입력 2009년 5월 31일 13시 56분


제22장 문전박대

어떤 비밀은 양파 껍질을 까듯 알아내기 힘들다. 까고 까고 또 까 들어가도 진실은 드러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깐 후 아무 것도 찾지 못했을 때의 망연자실함이여!

"클리닉에 다닌 건 맞습니다. '배틀원 2049' 조직위원회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니까요. 그룹 치료를 함께 받은 사람들을 기억하냐고요? 네 맞습니다. 시정희, 변주민, 방문종? 아줌마 하나에 남자 둘 맞습니다. 박말동 씨라고 했습니까? 우리 모임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만…… 아아, 기억이 납니다. 개인사정으로 불참했지만 그 전에 상담치료를 했다면서, 노원장이 치료영상을 보여 줬습니다. 꽃꽂이에 빠져 있다기에 유심히 봤죠. 가업을 물려주려 하는데, 아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울분을 터뜨리더군요. 이제 됐습니까? 곧 8강전이 시작됩니다. 제게 이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따로 설명 드리지 않겠습니다."

최 볼테르가 홀로그램을 끊으려고 했다.

"자, 잠깐만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지난 밤, 차세대로봇연구센터로 들이닥쳤지만, 최볼테르도 글라슈트도 없었다. 오늘 시합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보안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비밀 연구소로 숨은 것이다. 석범은 글라슈트 팀과 주로 거래하는 로봇 부품 회사를 파악하라고 앨리스에게 명령했다. 다음에 또 이런 식으로 사라지면 위치추적이라도 하기 위함이었다.

앨리스를 성창수와 지병식이 있는 폐쇄 지하통로로 보낸 후, 석범은 신원미상 사내인 '꽃뇌'와 박말동의 동일인 여부를 확인하는데 주력했다. 뇌는 사라지고 얼굴 피부까지 모두 제거되었지만, 사체에는 신원을 추정할 부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박말동의 치과와 정형외과 치료기록을 우선 참조했다. 어금니가 좋지 않아서 반 틀니를 맞춘 기록과 화분을 옮기다가 떨어뜨려 왼발등뼈가 부러진 사실이 주목되었다. 99.9퍼센트 동일인이라는 보고를 받은 후 석범은 잠시 눈을 붙였다. 그 사이에도 계속 볼테르를 비롯하여 민선과 사라, 세렝게티와 보르헤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불통이었다.

창수의 참혹한 죽음을 접하고도 장례식장에 들러 조의를 표할 여유가 없었다. 방문종 패거리가 창수의 죽음과 정말 연관이 있다면 오늘 하루 문종은 더 깊이 숨을 것이다. 그러나 볼테르와 글라슈트 팀은 상암동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석범은 앨리스와 병식을 데리고 새벽이슬을 맞으며 상암동으로 출발했다.

석범은 보안청에 볼테르의 강제구인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볼테르가 살해 위협을 받았거나 신변 보호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범인으로 추정될 직접 증거가 없기 때문에 강제구인은 위법이라는 것이다. 같은 병원에서 그룹 치료를 받은 네 사람 중 두 명이 살해당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남은 생존자의 자유를 구속할 수는 없었다.

볼테르를 경기장 밖에서 낚아채는 데는 실패했다. 시합 한 시간 전, 주최 측이 준비한 지하 통로를 통해 글라슈트 팀이 출전로봇 대기실로 곧장 들어온 것이다. 앨리스가 로봇 대기실 밖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자, 세렝게티와 보르헤스 그리고 민선이 대기실 밖 복도까지 나왔다. 석범은 협조를 구했지만, 민선은 경기 전엔 누구도 만나지 않는 것이 볼테르의 습관이라며 거절했다. 석범은 1분이라는 단서를 달고 영상통화를 청했고, 볼테르는 마지못해 그 청을 받아들였다.

"위협은 없었습니까? 특별히……"

석범의 말을 볼테르가 끊고 들어왔다.

"자연인 그룹의 위협이야 늘 있는 일입니다. 그래봤자 인간과 로봇의 공생이란 거대한 물줄기를 막을 순 없지요. 염려 마십시오.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시합이나 보고 가십시오. 그럼 이만!"

볼테르의 얼굴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썅, 시합이나 보라고? 우리가 여기 놀러온 줄 알아?"

앨리스가 주먹을 쥐락펴락 하며 화를 냈다.

"너무하네 정말. 자기들 봉변 당할까봐 도와주겠다는데 문전박대로군."

병식도 싫은 소리를 보탰다. 단짝 창수를 잃은 슬픔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에 통통하던 볼이 쏙 들어갔다.

"자, 그만 돌아들 가세요. 시합 끝난 후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 볼 게요. 지금 예서 이러신다고 얻을 게 없잖아요?"

"이거 완전히 자기들 멋대로군. 우린 뭐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앨리스가 민선의 코앞까지 바싹 다가섰다. 당장이라도 드잡이를 시작할 기세였다.

"그만! 그만 둬."

석범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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