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07>

  • 입력 2009년 6월 3일 13시 20분


찰스가 온몸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제법이군. 장난은 이쯤하고 그만 항복하시지? 청장님 앞에서 보안청 요원들을 다치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개 소리!"

비웃는 앨리스를 향해 찰스가 곧장 퉁퉁투웅 돌진했다.

"피햇!"

석범이 급히 앨리스를 밀며 찰스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동굴에 거꾸로 매달린 박쥐처럼, 그는 찰스의 목을 힘껏 틀어쥐고 죄기 시작했다. 컥 컥컥. 찰스가 손을 휘저으며 힘겹게 숨을 토해냈다. 그러나 석범의 공격은 거기까지였다. 찰스의 변신다리가 낙지발처럼 늘어나더니 똬리를 틀며 돌다가 석범의 두 다리를 휘감아 패대기를 쳤다. 저만치 나가떨어진 석범은 머리를 다친 듯 당장 반격을 위해 일어서지도 못했다.

"부셔!"

로봇들이 찰스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대기실을 향해 나아갔다. 찰스는 끙끙 앓는 민선을 향해 코웃음까지 쳐댔다.

"노 박사, 당신이 자초한 일이오. 진작 내 말만 들었대도……."

그 말이 끝나기도 전, 꽝! 하는 굉음과 함께 대기실 문이 박살났다. 문을 부수고 공중제비를 돌며 날아 내린 이는 로봇 트레이너 서사라였다. 이미 문이 부서졌기 때문에 경호로봇들도 제 자리에 멈췄다. 사라는 가볍게 지그재그 스텝을 밟으며 로봇 석 대를 차례차례 차고 찍고 꺾었다. 한 동작에 하나씩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짝짝짝!"

갑자기 박수소리가 들렸다. 고 청장이 사라에게 다가서서 아는 척을 했다.

"서사라 트레이너죠? 반갑습니다. 지난 번 테러로 많이 다쳤다고 들었는데, 이제 완쾌되었습니까? 글라슈트의 다이나믹한 공격과 단단한 수비는 모두 서 트레이너의 무술에서 비롯되었다더니, 과연 대단합니다."

고 청장이 찰스와 시선을 교환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가 즉답 대신 쓰러진 석범과 앨리스를 흘끔 살폈다. 찰스가 끼어들었다.

"반갑소. 서 트레이너! 다음엔 글라슈트가 아니라 서 트레이너를 집중 조명하는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어야겠소. 지금처럼만 해주시오. 그래야 서 트레이너도 좋고 또 <보노보>도 좋고 청장님께도 좋은 일 아니겠소?"

"청장님께도 좋다뇨?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사라의 물음이 날카로웠다. 고 청장이 양팔을 어깨 높이까지 들고 손바닥을 벌린 채 도닥거리는 시늉을 했다.

"자자, 진정하세요. 하여튼 나는 서 트레이너만 믿습니다. 백전백승, 알겠죠?"

사라가 즉답을 하지 않자 찰스가 또 나섰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실망시켜 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제 믿으시겠지요?"

사라가 다시 물었다.

"대체 무슨……?"

찰스가 얼굴을 한껏 찌푸리며 말허리를 잘랐다. 아랫사람 대하듯 반말로 바뀌었다.

"청장님이 격려하시면 감사합니다 하면 되지 뭘 따져 따지길."

사라의 무게 중심이 뒷발로 옮겨졌다가 앞발로 쏠렸다. 당장 날아올라 찰스의 턱을 올려 찰 기세였다. 찰스가 사라의 발을 내려다보며 한 마디 보탰다.

"그 스텝 참 좋군. 글라슈트가 32강과 16강 두 게임을 이긴 것도 스텝 덕분이었지. 도와주겠다는 내 제안을 잘 생각해봐. 자고로 돈 없이 되는 일은 없으니까. 그건 그렇고 글라슈트는 어디 있어? 청장님도 오셨는데 아직도 대기실에 처박혀 있는 건가? 무례하군."

사라가 퉁퉁 걸어 나오는 찰스를 막아섰다. 찰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기어이 한 판 하자는 게야?"

"원하신다면!"

사라가 무릎을 쳐올리는 것보다 글라슈트가 껑충 뛰어 그녀 뒤에 내려서는 것이 더 빨랐다. 방금 전까지 뒤엉켜 싸웠던 이들이 한꺼번에 글라슈트를 올려다보았다. 부서진 문을 걸어 나온 볼테르가 찰스를 향해 물었다.

"마지막 스파링입니까? 경호로봇들과 한 판 붙어보라는 건가요?"

긴장감이 맴돌았다.

글라슈트는 허리를 약간 굽히면서 고개를 쳐들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고 청장이 그 위세에 눌려 볼테르와 찰스의 눈치만 살폈다. 이윽고 찰스가 오른 주먹을 치켜들어 손목을 돌리면서 말했다.

"얼굴 봤으니 오늘은 이 정도로 하지. 로봇 하나 믿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으스대지만 곧 현실이 뭔지 깨달을 날이 올 거야. 오늘 시합부터 이겨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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