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08>

  • 입력 2009년 6월 4일 13시 35분


[인간들의 대리전]

세상에는 두 종류의 로봇이 있다. 인간을 위해 일하는 로봇과 인간을 대신해 일하는 로봇. '데스 매치'에 출전한 로봇들은 인간을 위해 링에 올라온 '테크노 엔터테이너'일까, 아니면 자신을 만들어준 로봇공학팀의 욕망을 실현하는 '기계 대리인'일까?

2049년 7월 2일 밤 10시 45분이 다가오자, 분주하게 움직이던 PD 로봇들과 카메라 로봇들의 움직임이 잦아들면서, 하얀 조명이 스포츠 캐스터 정훈일과 로봇 해설위원 미르코 크로캅을 향했다. 피디가 큐 사인을 보내자, 방금 전까지 진지한 표정을 짓던 정훈일 캐스터가 미소 모드로 표정을 바꿨다.

"로봇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 이곳은 '배틀원 2049' 8강전이 뜨겁게 열리고 있는 상암동 로봇격투기 전용경기장입니다. 저희 <보노보>에서는 8강전을 포함 '배틀원 2049' 모든 경기를 실황으로 생중계해 드리고 있는데요, 이제 8강전의 마지막 경기인, M-ALI(예루살렘, 우승확률: 17/100)와 글라슈트(서울, 우승확률: 10/100)의 데스 매치만이 남았습니다. 제 옆에는 오늘도 로봇격투기 해설위원 미르코 크로캅 씨가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이 경기 어떻게 예상하고 계십니까?"

"네, 매우 폭력적인 경기가 되리라 예상합니다. 지난 16강전에서 지능적인 경기 운영으로 카라데 마스터의 가슴 부위를 집중 공략해서 아주 효율적으로 CPUC IV(중앙정보처리회로)를 산산조각 낸 M-ALI가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경기를 준비하고 있구요. 이번 대회 최대 화제 로봇이자 최대 강적이었던 자이언트 바바 III의 목을 회오리 훅 한 방으로 부러뜨린 글라슈트가 대격돌을 벌입니다. 둘 다 막강한 로봇들이어서 한치 앞도 예상하기 힘든데요, 상암동의 도박사들은 M-ALI의 우승 확률을 17/100으로 상향 조정해 놓은 상태구요, 글라슈트는 10/100으로 상향 조정한 상태입니다. 상대적으로 글라슈트 보다는 M-ALI가 이길 확률이 조금 더 높습니다."

"아, 그렇군요. 9시에 경기가 시작되는데요, 경기에 앞서 현재 두 로봇이 링 밖에서 최종 점검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사이 막간을 이용해서 8강전 전적과 경기 상황을 소개해 주시지요."

"네, 그렇습니다. 8강전은 어느 경기 하나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모두 명승부였는데요."

정훈일 캐스터가 흥분한 듯 끼어들었다.

"아주 훌륭한 경기들 아니었습니까? '배틀원 2049' 운영위원회가 화려하고 박력 넘치는 경기를 위해 격투 로봇의 수리 및 정비 기간을 예정보다 24시간 연장한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로봇들 기량이 떨어지기는커녕 향상되고 있는데요, 지난 8강전 경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8강전 첫 경기는 밴너 사바테 5와 무사시 (동경, 우승확률: 31/100)가 경기를 벌였습니다. 16강전에서 SRX 9000의 팔을 자르고 펀치 공격으로 가슴을 두 조각낸 무사시가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밴너 사바테 5에게 고공 점프로 달려든 후 10초에 14회 이상 가격하는 '패스트 리피타티브 펀치'로 데스 신호를 얻었죠. 가슴만 집중 가격하는 효율적인 공격으로 가볍게 이겼는데요, 여기에는 밴너 사바테 5가 저항할 수 없도록 무사시가 자신의 두 다리를 완전히 꺾어서 밴너 사바테 5의 두 팔을 바닥에 고정시키는 새로운 테크닉을 선보여 관람객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습니다."

"네, 맞습니다. 가볍게 이긴 것 같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준비한 테크닉인 것 같지요."

"다음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아이언 반달레이와 졸리 더 퀸 (뉴욕, 우승확률: 30/100)이었는데요. 풀메탈패닉 K와의 대결에서 '2미터 점프 돌려차기'를 선보여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던 아이언 반달레이가 이번에도 고공 점프 후에 돌려차기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졸리 더 퀸이 옆으로 피하면서, 두 다리로 아이언 반달레이를 넘어뜨리고 무려 1분 40초 동안 조르고 비트는 잔인한 공격으로 두 다리와 두 팔을 모두 뜯어냈습니다. 덕분에 도박사들은 졸리 더 퀸의 우승확률을 30/100으로 상향 조정했습니다."

"네, 엄청난 파괴력이었죠."

"베를린의 슈타이거와 동경의 R-AURA 6000의 경기는 정말 난타전이었습니다. 온갖 격투기술들이 8분 32초 동안 다양하게 등장해서 관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는데요, 니킥의 달린인 슈타이거와 이번 대회 최대 다크호스인 싱가포르의 R-AURA 6000가 며칠 사이 더욱 강해진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R-AURA 6000은 복부와 옆구리를 펀치로 가격하는 바디블로와 상대방의 턱이나 머리를 노리고 차는 브라질리아킥을 여러 차례 선보여 큰 갈채를 받았습니다. 니킥으로 꾸준히 하체를 집중 공격했던 슈타이거가 8분 30초경에 공중에서 돌면서 킥을 날리는 '토네이도 앤디'를 날려 한방에 R-AURA 6000의 데스 신호를 얻어냈습니다. 정말 명승부였습니다."

"앗, 이렇게 말씀드리는 순간, M-ALI와 글라슈트의 8강전 마지막 경기가 시작됐는데요, M-ALI가 글라슈트 주변을 차분히 돌면서 바디블로를 계속 날리는데요."

"글라슈트의 걸음은 좀 자연스럽지 못 한데요, 뭔가 중앙제어 시스템이 두 다리를 잘 통제하지 못하는 느낌인데요, 부속품이 문제가 있는 걸까요?"

"글라슈트가 계속 맞기만 하다가, 팔을 뻗어 잽을 날리고 있는데요, 아직 제대로 맞지는 않고 있습니다."

"아, 글라슈트, 갑자기 로우킥과 함께 팔을 걸어 넘어뜨리려는 기술을 사용했다가, M-ALI의 플라잉 니킥(턱을 무릎으로 가격하는 기술)에 맞아 넘어졌습니다. 두 다리의 제어가 이상하다보니, 중심을 잘 못 잡네요."

"미르코 크로캅 씨, M-ALI의 움직임이 아주 가벼워 보여요. 발바닥을 링 바닥에서 멀리 띄우지 않으면서 글라슈트의 주변을 맴돌다가 바디블로와 미들킥을 계속 날리는 모습이 매우 안정적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글라슈트라고 얕보면 안돼요. 지난 경기에서도 계속 열세에 몰려 있다가 회오리 훅 한방으로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거든요."

"말씀하시는 순간, 글라슈트의 다리 동작이 이젠 좀 자연스러워졌어요. 적응제어시스템을 사용하는 모양인데요, 하지만 계속 바디블로를 맞고 있는 모습은 안타까운데요, 몸의 움직임이 좀더 빨라야겠……어!"

"어!"

정훈일과 미르코 크로캅의 입에서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스포츠 중계를 하는 로봇들에게 '탄성 모드'는 경기의 흥미를 돋우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말씀드리는 순간, 17번째 바디블로를 얻어맞던 글라슈트가 M-ALI의 왼팔을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친 후 올라타서 얼굴 펀치를 계속 날리고 있는데요, 아까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네, 갑자기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고요, 방금 글라슈트의 눈빛 보셨습니까? 16번째 바디블로가 굉장히 타격이 쌨거든요. 마치 성난 곰처럼 달려들어 얼굴을 마구 공격하고 있는데요, 얼굴이 거의 떨어져 나갈 것 같은데요."

"네, 말씀드리는 순간, M-ALI의 두 다리라 마구 떨리다가 데스 신호가 발생됐네요. 글라슈트, 갑자기 치고 들어가 상대를 제압한 후에 몰아치는 공격 패턴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로서, 8강전의 마지막 경기 글라슈트 대 M-ALI의 경기는 글라슈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7월 5일 저녁 9시 이곳 상암동 로봇격투기 전용경기장에서 꿈의 4강전을 생중계해 드리겠습니다. 로봇 격투기 대회는 보! 노! 보!"

정훈일과 미르코 크로캅이 생중계를 마무리하는 사이, 경기장에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하얀 종이비행기가 경기장을 가득 매우며 날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바닥에 굴러다니거나 깔린 종이비행기도 수백 장이 넘었다. 종이비행기를 펼치자 짧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인간의 미래를 로봇의 어깨 위에 올려놓을 순 없다. 잔인한 피의 혈전이 그토록 보고 싶다면, 링 안으로 아수라장인 세상을 쳐 넣어 주겠다. 배틀원은 사악한 인간들의 대리전!"

자연인 그룹의 소행이었다. 다시 테러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