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11>

  • 입력 2009년 6월 9일 13시 01분


믿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면, 발등보다 먼저 마음이 아프다.

앨리스와 병식은 방문을 박차고 복도를 달렸다.

"거기 서!"

등 뒤에서 거친 욕설과 고함이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고 질주했다. 복도로 나서자마자 왼편으로 꺾었다면 29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겠지만, 앨리스는 무의식적으로 오른편을 택했고, 두 사람은 복도를 꺾고 꺾고 또 꺾을 수밖에 없었다. 달리며 앨리스는 생각했다.

폐쇄통로에서처럼 총을 쏘면 어쩌지? 지 선배와 내가 문종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놈들이니, 눈에 뵈는 게 없을 거야.

두 번 꺾었지만, 총소리는 들리지 않고 급한 발소리만 시끄러웠다.

"저기서, 먼저 틀어!"

병식이 소리쳤다. 이렇게 한 바퀴 크게 돌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변화를 줘야했다. 앨리스는 빠르게 왼편 좁은 복도로 몸을 틀었다. 병식의 총상을 당한 어깨가 계속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 흩어져서 시간을 벌고 석범에게 연락을 취한 후 다시 병식과 합치는 것이 순서였다.

하나, 둘, 셋, 네 번째 방문이 열려 있었다. 앨리스는 급히 방으로 들어간 후 문을 잠그고 탁자를 밀어 막았다. 가슴에 부착한 돌고래 모양 브로치를 눌렀다. 화상과 음성전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초소형전화기였다. 화면이 잡히지 않고 사선으로 석범의 얼굴이 찢어졌다.

문종이 30층만 따로 무슨 짓을 해둔 걸까?

앨리스는 석범에게 들리기를 기대하며 짧게 이야기했다.

"빨리 와주십시오. 방문종은 사망했고, 지 선배와 전 문종의 친구들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급합니다."

쾅쾅쿠왕!

그 순간 문이 세차게 울렸다. 녀석들이 온 것이다.

앨리스는 브로치를 다시 누른 후 가볍게 일어서서 총을 꺼내들었다. 녀석들이 힘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특등사수의 솜씨를 뽐낼 수밖에!

"남 앨리스 형사님! 문 여시죠."

건들거리는 목소리에 비웃음이 담겼다.

내 이름을 안다? 어떻게? 지 선배가 끝내 붙잡힌 건가?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지병식 형사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순순히 문을 열고 나오세요. 그러면 지 형사님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성격이 지랄 맞은 놈들입니다. 셋을 셀 테니 답을 주십시오. 좀도둑마냥 계속 숨겠다면, 지 형사님 이마에 총알부터 한 발 박아드리고 남 형사님을 뵈러 들어가겠습니다. 자, 세겠습니다. 하나, 둘!"

"그만!"

앨리스가 소리쳤다. 복도에서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

"아하, 역시 거기 계셨군요. 자, 이제 숨바꼭질 그만하시고 나오시죠."

"지 선배가 무사하다는 걸 먼저 확인시켜줘."

"오오 역시 주도면밀 남 형사님이십니다. 좋습니다. 지 형사님! 남 형사님과 인사 나누시죠?"

이어서 병식 특유의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남 형사! 미안해. 나 상관 말고 그냥 버텨. 이 새끼들 믿지 말……"

퍽, 소리와 함께 말허리가 잘렸다.

"선배, 지 선배! 괜찮습니까?"

병식 대신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받았다.

"남 형사 당신이 쥐새끼 흉낼 내는데 괜찮을 리가 없지. 자, 당장나와. 아니면……."

"알겠어. 나간다, 나간다고. 지 선배한텐 아무 짓 마."

앨리스가 탁자를 밀어내고 잠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네댓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내 하나가 고개만 삐죽 내밀었고, 앨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웃어보였다. 그리고 곧 문으로 지팡이를 흔들며 쑥 들어섰다. 그를 따라 병식의 목을 뒤에서 감고 총구를 관자놀이에 댄 채, 뚱뚱한 사내가 들어섰다. 남자 다섯 여자 둘이 더 들어온 다음 문이 닫혔다. 사내가 지팡이를 들어 앨리스의 총을 가리켰다.

"그것부터 이리 던져."

앨리스가 총을 바닥에 댄 후 사내에게 밀었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펴고 서며 병식을 향해 물었다.

"지 선배, 괜찮아요?"

사내가 앨리스의 총을 집어든 후 입김으로 총구를 후우 불었다. 그리고 병식에게 다가갔다.

"안돼."

앨리스가 소리쳤다. 사내가 앨리스를 보며 피식 비웃은 후 병식 앞으로 총을 내밀었다. 목을 감싸 쥐었던 뚱보가 천천히 양손을 머리 위로 드는 것과 동시에 병식이 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앨리스에게 말했다.

"남 형사!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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