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18>

  • 입력 2009년 6월 18일 12시 54분


[기억은 개처럼]

한때 암스테르담에서 상담치료를 했던 심리학자 다우베 드라이스마는 시간과 기억에 관한 자신의 오랜 연구경험을 묶어낸 책에서 '기억은 마음 내키는 곳에 드러눕는 개와 같다'고 했다. 아무데나 드러눕는 개처럼, 인간의 기억은 갑자기 사라지고, 엉뚱한 곳에 오래 머물며, 사라지지 않게 해달라고 애걸하다가, 이내 잊혀진다. 인간의 기억은 왜 그토록 불안정한 것일까?

은석범은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해묵은 화두' 같은 이 질문의 언저리에서 넋을 놓고 있었다. 다리를 책상 위로 올리고 느긋하게 엉덩이로 회전의자를 돌리며, 스티머스를 개발할 때의 기억들과 지난 몇 달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렸다.

특별시립 뇌 박물관 학예팀과 함께 스티머스, 그러니까 '단기기억 재생장치'(STEMERS·Short-term Memory Retrieval System)를 처음 개발할 때도, 학예팀의 몇몇 연구원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그 중 팀장인 윤경식 박사는 오랫동안 '기억의 불안정성'을 연구해온 신경공학자로서, 기계적 도움으로 기억을 재생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석범에게 논리적으로 공격했다. 회의 때마다 석범은 윤박사가 제시하는 과학적 근거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 논쟁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윤 박사가 인용한 기억상실증 환자에 대한 연구결과를 토론했던 밤이다. 2005년인가,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뉴욕의 어느 신경과 의사들이 정상인 피험자와 기억상실증 환자를 모은 후 '상황을 주고 상상하는 과제'를 냈다고 한다.

"앞에 바다가 보입니다. 당신은 지금 해변의 모래사장 위에 서 있구요. 앞에 무엇이 펼쳐 보이는지 3분간 상상해 보세요. 뭐가 보이나요?"

실험자인 의사가 진지하게 요청하자, 정상인 피험자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다양한 상상을 풀어놓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서히 지는 태양, 개와 함께 달리는 아저씨, 서로 키스를 하는 연인들,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 동전을 주으러 돌아다니는 아줌마, 혹은 갑자기 나타난 상어.

피험자들은 조금씩 엉뚱한 상상에 재미가 들려 더 엽기적인 상황으로 가기도 하고, 야한 상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평소 꿈꾸던 샹그릴라를 묘사하기도 했다.

놀라운 것은 기억상실증 환자들이었다. 그들은 미래를 상상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온통 파래요.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랗고. 온통 다 ... 파래요."

그들은 3분 내내 파랗다는 얘기밖에 하지 못했다. 윤경식 박사에 따르면, 이 연구결과는 당시 과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를 상상하지 못한다는 실험결과는 '기억의 존재 이유'를 새롭게 해석하게 만들었다.

기억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해 두는 대뇌 활동이 아니라 매순간 변하는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경험의 질료'라는 것이다. 기억은 과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기억이 매 순간 변화한다면, 스티머스가 재생한 기억은 얼마나 믿을만한 것일까? 인간의 뇌는 스티머스란 환경에서 과연 어떤 기억을 만들어낼까?

왜 사람들은 '동네 한 바퀴' 같은 추억의 사이트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까? 어린 시절 기억을 끄집어내 곱씹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우리의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은 왜 그때보다 지금 더 근사하고 아련하고 행복하게 포장돼 있는 걸까? 왜 문종은 아직도 '동네 한 바퀴' 같은 사이트를 배회하면서, 못된 짓이나 일삼는 걸까? 아무데나 드러눕는 개처럼.

석범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가 옛 기억과 어제 기억을 떠올리며 하릴없는 '범인추리 놀이'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부드러운 신호음이 들리더니 이미선 비서의 홀로그램이 책상 위에 나타났다.

"최재민 청장님께서 은 검사님을 보자고 하십니다.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청장님이? 무슨 일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되도록 지금 보자고 하시네요."

"알았어. 금방 가겠다고 전해 드려 줘."

"11층 세미나실로 오시라고 합니다."

석범은 자켓을 챙겨 입고 11층으로 향했다.

보안청장이 날 왜 호출했을까? 스티머스를 그다지 탐탐치 않게 생각해온 그와 요즘 같은 때 만나는 건 왠지 불길하다.

11층 세미나실에 들어서니, 최재민 청장과 두 명의 부장검사가 앉아 있었다. 2048년 1월 9일, 이곳 11층 세미나실에서 처음 스티머스가 작동하는 것을 시연했을 때 참석했던 사람들이었다. 앉은 위치도 그때와 똑같았다.

"은 검사, 이리와 앉게. 요즘 많이 바쁘지?"

최재민 청장이 그를 멋쩍게 웃으며 맞이해 주었다.

"대뇌수사부의 목적과 역할이 뭔가?"

한 부장검사가 숨 고를 여유도 주지 않고 곧바로 은 검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뇌수사팀의 임무는 살해당한 피해자들의 마지막 단기 기억을 영상으로 재생시켜 범인을 체포하는 겁니다."

석범은 2048년 1월 9일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고 뇌가 사라지는 끔찍한 연쇄살인이 여러 건 벌어졌어. 어떻게 된 거야? 대뇌수사팀은 보안청 내에서도 비밀조직인데……. 이거, 기밀이 샌 거 아니야? 범인이 그걸 알고 더 끔찍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거 아니냐구?"

옆에 있던 다른 부장검사가 격앙된 목소리로 쏘아댔다.

"그건 아닙니다……. 아니, 그럴 리 없습니다……."

"다른 곳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면, 대뇌수사팀 내부에 범인이 있거나……."

부장검사가 비아냥거리듯 말을 던졌다.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기록을 보니, 당신, 최근 들어 앵거 클리닉에 방문해서 치료를……."

점점 더 험악한 분위기로 넘어가려는 순간, 최재민 청장이 부장검사의 말을 점잖게 제지하고, 대신 말을 이었다.

"은 검사, 대뇌수사팀의 활동을 지켜보았네. 스티머스는 놀라운 장치이고, 실제로 몇몇 골칫거리 사건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네. 하지만 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끔찍한 살인사건이 몇 건이나 터졌고, 게다가 지병식, 성창수 형사가 죽었어. 이제 대뇌수사팀에는 4명 중에 두 명만이 남아 있고. 뇌가 없는 연쇄살인들이라서 스티머스가 해답을 줄 것 같지도 않아 보이네. 그래서 보안청은 현재 대뇌수사팀의 해체를 검토하고 있네."

"해체라고요? 대뇌수사팀을 해체한다고요? 이제 제대로 된 수사를 맡아 막바지에 접어들었는데, 해체라니요! 시간을 더 주십시오. 저희가 반드시 범인을 잡겠습니다."

"지금 막바지라고 했나?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범인에 대한 확보된 단서는 뭐가 있나? 은 검사랑 남 엘리스 형사, 둘이서 범인을 잡겠다는 건가? 이러다가 나는 은 검사와 남 형사마저 잃진 않을까 걱정이네. 그러지 말고 사건을 특별수사대 강력계로 넘기게. 우리가 시간을 길게 끌면 끌수록 나중에 그들이 해결하기도 더 힘들어져. 스티머스도 곧바로 해체하고."

최 청장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청장님, 너무 하십니다. 저희에게 한번만 기회를 더 주세요. 스티머스는 저희가 24개월이나 준비했고 1년 6개월이나 활용한 프로젝트입니다. 여기서 이대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제 손으로 범인을 잡고 싶습니다. 그것이 스티머스의 존재 이유입니다. 거의 범인의 윤곽이 보입니다. 심증이 있다고요!"

논리적으로 말하는 최재민 청장에게 석범은 어리광을 부리듯 떼를 썼다. 그의 간청은 절박해 보였다. 나이 80이 넘은 청장과 부장검사에게 석범은 '마음 내키는 곳에 드러눕는 한 마리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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