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19>

  • 입력 2009년 6월 21일 13시 45분


제7부 어쩌란 말인가 도시는 굶주려 있는데

제25장 그리운 이와의 대화

119회

수습이 불가능할 땐 차라리 상대방에게 결정을 미루는 편이 낫다.

석범이 보낸 방문종 관련 자료를 검토한 노윤상 원장은 외출준비를 서둘렀다. 준비라고 해봤자 흰 가운을 벗고 점퍼를 걸친 다음 중절모를 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똑똑!"

"들어와요."

노크 소리가 나자마자, 노 원장은 밖에 선 이가 누구고 무슨 이유로 그를 찾는지 아는 것처럼,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최미미가 문을 천천히 열고 고개만 쏙 들이밀었다.

"원장님! 바쁘세요?"

그는 벽에 붙은 낡은 시계를 확인한 후 답했다.

"3분 23초 여유가 있군."

미미가 등 뒤로 문을 닫고 서서 잠시 망설였다. 앵거 클리닉에는 인간이라곤 노윤상 원장과 최미미 간호사 단 둘 뿐이다. 둘 뿐이니 더 자주 더 많이 이야기할 것 같지만, 그들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는 한 달에 한두 번이 전부다. 노 원장이 환자들을 만나는 동안 최 간호사는 간호로봇들과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빴다. 메디컬 존에 자리 잡은 병원 중 상당수는 간호사 전체를 로봇으로 대체하였다. 앵거 클리닉 역시 완전자동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지만, 노 원장은 미미만은 남겨 두었다.

미미는 품에서 사직서를 꺼내 책상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이게 뭔가?"

"……그만 두려고요. 해고하셔도 할 말 없습니다."

"해고? 난 최 간호사를 해고할 뜻이 없는데, 최 간호사는 내 곁을 떠나고 싶은 모양이군."

노 원장은 꺼풀을 입힌 책들을 슬쩍 살피며 딴전을 피웠다. 미미가 먼저 이렇게 와서 사과하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보안청에서 나왔다기에…… 살인범을 잡아야 한다고 해서…… 잘못했습니다."

미미는 진료기록을 석범에게 넘긴 다음 날부터 안절부절 못했다. 기록을 넘긴 후엔 노윤상 원장이 잡혀가거나 자신이 다른 병원으로 옮겨 가리라 여겼다. 그러나 노 원장은 정상 출근했고 보안청으로부터는 연락이 없었다. 앨리스와 통화를 했더니, 일단 정상 근무를 하면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 했다.

"최 간호사는 법적으로 잘못한 게 없어. 보안청에 협조하는 것은 특별시민의 의무니까. 물론 진료기록실 출입은 원장인 내 허락을 반드시 얻어야 하지. 허나 그런 상황이라면 나였다고 해도 최 간호사처럼 행동했을 거야. 이 사직서는 받지 않겠네."

"하지만 제 마음이……."

"불편하다 이거군. 여길 그만두면 따로 갈 데라도……?"

"아니에요."

"혹시 결혼이라도……?"

"아니에요, 그런 거."

미미는 잠시 로봇 '부엉이'를 떠올렸다. 석범은 그와의 멋진 데이트도 주선하겠노라 약속했었다.

보안청엔 거짓말쟁이들만 모였네! 짜증!

"마음이 불편하단 이유 하나만으로 병원을 그만두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 겐가?"

노 원장은 환자와 상담하듯 날카롭게 물었다.

"그게…… 그게 말이에요……."

미미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노 원장은 눈을 감고 차분히 기다렸다. 이 침묵엔 당장 속마음을 드러내라는 압력이 실렸다.

"원장님이, 꼭…… 살인마 같아서요. 아니라고 되뇌지만, 한 번 마음을 먹고 나니 바뀌지가 않아요. 원장님이 그 환자들을 차례차례 죽이고 뇌를 꺼내는 상상을 하니까, 한 순간도 못 있겠어요. 물론 저는 원장님을 믿지만, 원장님도 생각을 해보세요. 연쇄살인마에게 당한 사람들이 우리 병원을 다닌 건 사실이잖아요? 그들을 하나로 엮는 유일한 끈이 바로 우리 병원인 거고요. 간호로봇들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도 없고, 저도 아니니, 원장님밖에 안 남더라고요. 원장님이 환자들과의 상담 내용을 절대로 공개하지 않으시는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연쇄살인마를 잡는 일인데, 또 우리는 보안청 협력병원인데, 딱 잘라 거절하신 것도 이상하고요. 하여튼 잘못했어요. 잘못했지만, 원장님! 정말 살인마 아니시죠? 누굴 죽인 적 없으시죠?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원장님이 살인마면 벌써 날 죽였겠지. 어멋! 죄송해요, 원장님!"

미미가 퇴직하려는 진짜 이유를 횡설수설 뱉었다. 처음엔 자기 식대로 설명을 해나가다가 마지막엔 독백하듯 진심을 드러냈다.

"지금은 어때?"

노 원장이 더욱 짧게 물었다.

"예?"

"지금도 내가 살인마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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