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59>

  • 입력 2009년 8월 16일 13시 41분


제33장 로봇보다 위험하고 로봇보다 멍청한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순간에 싸움을 시작할 때가 있다.

석범은 뒷걸음질을 치며 지그재그 스텝을 밟았다. 글라슈트는 먹잇감을 노리고 접근하는 호랑이처럼 걸음걸음 흔들림이 없었다. 속도를 높여 달려들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위압감을 주었다.

쿵!

석범의 뒤통수가 4강전에서 글라슈트에게 패한 로봇 슈타이거의 배에 닿았다. 그는 더 이상 물러나지 못하고 총을 뽑아들었다. 그 순간 글라슈트가 날아오르며 플라잉 니킥을 시도했다. 강철 무릎에 가슴이나 턱이라도 맞았다면 뼈가 부러지며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으리라. 석범은 재빨리 슈타이거 뒤로 숨었고, 글라슈트의 무릎은 석범의 손에 든 총을 허공에 쳐올렸다. 글라슈트가 연속동작으로 왼발을 축 삼아 빙글 돌며 오른발로 슈타이거의 발목을 때리자, 작동이 중지된 슈타이거가 맥없이 쓰러졌다. 석범은 미리 바닥을 굴러 슈타이거의 육중한 몸에 깔리는 것을 피했다.

석범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글라슈트가 석범의 머리맡까지 나아와선 천천히 오른발을 들었다. 스탬핑 한 방으로 머리를 박살낼 작정인 것이다. 석범은 피할 수 없었다. 호랑이의 눈빛에 사로잡힌 토끼처럼, 글라슈트의 넓고 단단한 발을 슬로비디오처럼 쳐다볼 따름이었다.

"멈춰!"

때마침 볼테르가 돌아왔다. 왼손엔 길쭉한 종이상자를 들었고, 오른손 검지는 총을 쏘듯 글라슈트를 향했다. 글라슈트가 발을 든 채 고개만 돌려 볼테르를 쳐다보았다.

"멈춰! 글라슈트."

볼테르가 다시 명령했다. 천천히 글라슈트의 오른발이 왼발 옆으로 돌아왔고 동그랗게 떴던 눈도 감겼다.

석범이 엉덩이를 끌며 2미터 쯤 더 물러난 뒤 일어섰다. 글라슈트에게 다가서며 볼테르가 물었다.

"다치진 않았습니까?"

"자, 잠깐만, 거기 서!"

석범의 입에서 급한 마음에 반말이 튀어나왔다. 볼테르가 멈춰 서서 불쾌한 눈으로 석범을 노려보았다.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방금 날 죽이려고 했습니다."

볼테르가 석범의 경고를 무시하고 글라슈트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그리고 글라슈트의 배를 손바닥으로 둥글게 쓸어낸 후 등 뒤로 돌아갔다. 글라슈트는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체 뭡니까? 이상…… 행동? 그겁니까?"

석범이 여전히 거리를 유지한 채 따졌다.

"격투기 시합처럼 '완전자동'이 아니라 내 목소리엔 절대복종하는 '반(半)자동'입니다."

"날 죽이려고 달려들었다니까요."

"은 검사님이 먼저 이상행동을 했겠지요."

"내가 먼저 했다고요? 난 아무 짓 안 했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데 글라슈트가 공격해왔습니다."

볼테르는 볼펜 모양 부품을 종이 상자에서 꺼내 글라슈트의 등에 끼우며 말했다.

"글라슈트를 손상시키려 했거나 모욕적인 욕설을 했거나……."

"욕을 해도 죽이려 든단 말입니까?"

"죽이려 드는 게 아니라 그런 언행을 못하도록 상대를 제압하는 겁니다. 상대가 인간인 경우에는 몸에 손끝하나 대지 않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습니다. 방금 은 검사님과 글라슈트 사이에 접촉이 있었습니까?"

되짚어보니 직접 부딪힌 적은 없다.

"니킥을 피하지 않았다면 턱이 날아갔을 게고, 스탬핑을 시도한 건 최 교수님도 목격하지 않으셨습니까?"

"딱 거기까집니다. 위협적인 동작을 시작하는 '척' 하다가 멈추는 겁니다. 피하지 않았어도 니킥은 빗나갔을 테고 그냥 누워 있어도 스탬핑을 하려던 발을 거뒀을 겁니다."

앞뒤가 들어맞는 논리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석범은 예리하게 허점을 짚어냈다.

"그럼 왜 명령하신 거죠?"

볼테르의 두 눈이 글라슈트의 등 뒤에서 살짝 나왔다.

"그냥 누워 있어도 글라슈트가 스탬핑을 하지 않을 거라면, 왜 '멈춰!'라고 두 번이나 명령했습니까?"

"그, 그건……."

볼테르가 말을 더듬었다.

"글라슈트가 내 머리를 박살낼 지도 모른다고 예상한 것 아닙니까? 프로그래밍이 어떻게 되었든 그 순간에는 날 구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거 맞죠? 글라슈트가 프로그램과는 달리 이상행동을 취할까 걱정하신 겁니다."

갑자기 볼테르의 분노가 폭발했다.

"닥쳐! 미친 새끼…… 네까짓 게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흡.

그 순간 석범은 숨이 막혔다.

글라슈트가 눈을 번쩍 뜬 것이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