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야 우리 모두 색깔이 현란한 옷을 입고 다니지만 이것이 다 화학의 발달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는 특수계층만이 값비싼 천연염료로 물들인 옷을 입는 혜택을 누렸지만 그나마도 색상이 요즘같이 선명하지 못하고 우중충했다.
옷감을 물들이는 화학적 기술의 역사는 아마도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 것이다. 처음에는 풀잎이나 열매에서 옷감을 물들이는 염료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 선조들도 치자나 쪽, 창포로 옷감을 물들였던 기록을 갖고 있다.
역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본격적인 염료는 「인디고」라는 것이다. 4천년전의 이집트 왕실 무덤에서 인디고로 물들인 옷을 입은 미라가 발굴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천연염료는 매우 귀중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사용할 수 없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지중해 지역 특산의 달팽이가 분비하는 맑은 액체를 효소로 처리해서 「로열 퍼플」이라는 짙은 보라색 염료를 만들었다.
로열 퍼플은 왕립공장에서만 만들 수 있었고 다른 곳에서 이 염료를 만들면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전체를 로열 퍼플로 물들인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왕이나 감찰관 또는 승전장군뿐이었다.
극소수의 치장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달팽이가 희생되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려 1만2천마리의 달팽이를 잡으면 겨우 1.4g의 염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후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는 인디고페라 속(屬)의 향료 식물에서도 비슷한 염료를 얻게 되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염색된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달팽이나 인디고 식물에서 얻어지는 염료의 주성분이 인디고 분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독일 화학자들이 인디고를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이를 계기로 급속도로 발전한 염료 화학 덕분에 색이 다양한 인공 염료 합성법이 일반화되어 이제는 누구나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여진 옷을 입게 된 것이다.
선명한 색상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불순물이 섞여 있는 천연염료보다 순수한 염료 물질을 대량생산해야 하고 염료가 옷감에 잘 붙도록 하는 화학 기술도 필요하다.
우리도 서역에서 생산된 인디고와 같은 비싼 천연염료를 수입해서 왕족이나 고급 관리들만 사용했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어쩔 수 없이 염색이 안된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누구나 제한없이 무지개 빛깔 옷을 입을 수 있게 됨으로써 모두 평등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낄 수 있게 됐다. 그것이 바로 인류의 민주화에 이바지한 화학의 업적 중 하나다.
<이덕환:△서울대 화학과 졸업(77년) △미국 코넬대 박사(83년) △미국 프린스턴대 화학과 연구원(∼85년) △서강대 화학과 교수(85년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