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 항구 등 예상답안을 제치고 ‘글리화다 민박집’이 튀어나온다. 아테네 남쪽 글리화다의 황헌(48) 문유경씨(47) 집이다.
영화배우 기업인 교수 등 촬영이나 출장, 학회 등으로 그리스를 찾은 ‘각계각층’ 인사들이 그 ‘민박집’을 거쳐갔다. 문씨의 김치와 고추장찌게는 일품이다.
비행기표 잃어버린 사람을 며칠이고 재워주기도 했다. 집에 방이 없으면 근처에 싼 호텔을 찾아준다. 밤 배를 타고 다음 장소로 떠나면 야참용 김밥도 싸준다. 어머니가 여행가는 자녀 챙겨주듯 손님 일정에 따라 필요한 것들을 꼼꼼히 준비해준다. 분위기가 가족같다보니 밤새는줄 모르고 사는 얘기가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 가족은 90년 5월 그리스에 왔어요. ‘나프토마’라는 선박회사에 남편이 임원으로 취업하면서부터지요.”
황씨 부부는 여유있는 생활을 즐겼다. 딸 수영씨(24)는 파리 라쎈에꼴 건축전공 4학년, 수진씨(21)는 이공계대학인 파리 제7대학 1학년이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놀고 먹는 일’이 의미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엔 민박을 망설였다. 왠지 ‘고상’하지 않아 보였다.
불현듯 ‘나도 모르는새 고자세가 됐구나’ 싶었다. 나를 낮추는 훈련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문씨는 체면을 버리고 김치와 만두를 만들어 내다팔아봤다. 아테네의 한국인 중 김치를 담글 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98년, 첫 번째 민박 손님을 받았어요. 삼성 직원 4명. 주말이면 아는 사람들을 초대해 재워준적도 많지만 이날만은 참 떨리더군요. 돈받는 것도 겁나고…”
손님들이 맘에 안들어 할까봐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첫손님들’은 문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연발하며 돌아갔다. 지금까지 e메일을 주고받는다.
황씨는 홈페이지(my.netian.com/∼hwanggr)를 갖고 있다. 한국의 부모님께 사는 곳을 보여드리고 싶어 5년전 만들었다. 사진 몇장 달랑있는 조잡한 홈페이지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들러주었다. 답을 올리기 위해 황씨는 때아닌 그리스 공부에 몰두해야 했다. 지금은 알짜 그리스정보와 민박소개 등으로 네띠앙에서 제공하는 용량 20MB가 거의 다 차 고민중.
황씨는 아테네의 한국인 사이에 컴퓨터실력자로 통한다. 그리스신화 뮈토스 등 그리스 관련저서로 유명한 소설가 이윤기씨와의 인연도 컴퓨터 때문. 99년 가을 그리스 방문중이던 이씨가 한국에 송고할 글이 있었는데 노트북이 말썽을 일으켰다. 그리스의 여행사에서 ‘컴퓨터 전문가’라며 황씨를 소개했고 이씨는 무사히 원고를 보낼 수 있었다.
황씨는 다음달 ‘나프토마’ 회사일로 한국에 1주일간 출장을 온다. 민박 손님들을 만나볼 시간을 낼 수 있을지 일정을 이리저리 연구하는 중이다.
<김승진기자>sarafi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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