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통신업체의 직장인 요금제 광고를 패러디한 말에서 생겨난 ‘인터넷 폐인’이 네티즌 사이에서 새로운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폐인’은 1990년대 후반 인터넷에서 유행한 ‘엽기’가 사그라지면서 엽기 포르노 섹스 등 온라인 대중문화의 모든 장르를 아우른 경지로도 해석된다.
▽인터넷 폐인이란?〓과거 PC통신 하이텔 게시판 ‘플라자(Plaza)’에 장시간 매달려 있는 사람을 ‘폐인’이라고 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디지털카메라 정보제공 사이트 ‘DC인사이드’(www.dcinside.co.kr)의 ‘엽기 갤러리’와 포털사이트 ‘나우누리’(www.nownuri.net)의 유머 게시판에서 활동하는 부류로 나눠진다. DC인사이드측에 따르면 상시 접속 인원은 낮에는 5000명, 밤∼새벽에는 2만명 정도이며 나우누리도 비슷하다.
하루 최고 20시간 가까이 오래 인터넷을 하는 사람들로서 초고속 인터넷에 접속된 PC를 켜 놓은 상태에서 일하는 정보기술(IT) 업종 직장인이 많다. 대학생 연구원 일부 청년실업자들도 자주 눈에 띈다.
▽뭘 하나?〓사회에 철저히 무관심하며 폐쇄적인 이들은 자의적인 용어, 점잖은 말투와 선문답을 사용하며 개인적 관심사에 대한 의견을 집단적으로 나눈다. 다른 폐인이 올린 사진이나 글에 대한 의견을 ‘리플’(답변) 형식으로 올리면서 대화를 나눈다. 무효(마음에 안 듦) 쌔우다(하다) 방법하다(응징하다) 고구마(관심없다) 등의 은어를 사용하며 스스로를 본좌(本座)라고 부른다. 24시간 접속 인원이 넘쳐나기 때문에 답변은 순식간에 수십 개가 달리며, 첫 번째로 답변을 단 사람은 “1등”이라며 기뻐한다.
누군가 “휴대전화에 이상한 메시지가 왔소”라며 글씨가 깨진 채 수신된 문자메시지가 뜬 휴대전화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올리면, “옆에 있는 모나미 볼펜 어디서 구했소?” “스카이구려” “메시지가 방법 당했구려” 등의 답변을 올리는 식.
평소에 무관심하던 사회적 이슈도 나와 관련될 가능성이 높으면 엄청난 조직력을 보인다. 7월 서울대 인터넷 생활게시판(스누라이프)에 “40만원 이하를 받고는 과외를 하지 말자”는 게시물이 오르자 폐인들은 집단적으로 이 사이트를 ‘압박’(공격)해 사이트를 다운시켰다. ‘압박’이라는 말은 월드컵 기간에 코스타리카 기자의 셔츠 등판에 ‘Press of Costa Rica(코스타리카 언론)’를 ‘코스타리카의 압박’이라고 번역해 쓴 사진이 인터넷에 오르면서 폐인들 사이에서 일반화했다.
▽왜 생겼나?〓자연발생적.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들을 몇 개 사이트에 모은 것은 ‘면식’(라면만 먹고살기)하며 인터넷을 하는 모습을 누군가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DC인사이드의 엽기 갤러리에 올리면서부터라는 게 정설.
누군가 이 사진을 PC에 띄워 놓고 밥상을 차려 놓은 사진을 연이어 올린 데 이어, 이번엔 또 누군가 밥상 사진을 PC에 띄워 놓고 자신이 보고 있는 사진을 띄워 놓았고, 또 누군가가 이 사진을 띄워 놓고 고양이가 보고 있는 사진을 띄우고 또….
▽폐인의 경지〓자칭 ‘폐인’ 노동호씨(전북대 수의예과 2년)는 “전공분야에 대한 질문은 게시판에 띄웠을 때 폐인들로부터 돌아오는 전문적인 답변을 보고 감탄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DC인사이드 김유식 사장은 “몇 차례 오프라인 모임에서 만난 ‘폐인’들은 대부분 삼성SDS 데이콤 세스코 등 첨단 업종 종사자였다”고 말했다.
진단평가연구소 이석재 소장(조직심리학 박사)은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사회의 높은 기대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탈 행위를 온라인상에서 하는 것”이라며 “이들의 관심사와 말투 선문답 등 행동양식은 꽉 짜인 삶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나성엽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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