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여론 왜곡하는 뉴미디어 스나이퍼]<中> 사이비 언론을 닮아가는 블랙블로거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29일 03시 00분


돈 안주면 “망하게 해드리죠”… 무전취식형 ‘블로거지’까지


한 중소 정보기술(IT) 업체 대표는 최근 내부 보고서를 받고 깜짝 놀랐다. 파워블로거(인터넷상의 유명 블로거)가 리뷰를 하겠다며 수십만 원에 이르는 제품을 시도 때도 없이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고 줄기차게 술 접대를 요구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블로거는 자신을 접대하지 않으면 악의적인 리뷰를 올리겠다고 마케팅 담당자를 협박하기도 했다.

이 회사의 담당 직원은 “해당 블로거가 ‘안 본 지 오래됐다’며 한 달에 한 번꼴로 불러내 술 접대를 하게 하는 등 일상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이 블로거가 술자리에서도 ‘블로그에 글을 써야 하는데 잘 쓸 수 있게 지원 좀 하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털어놓았다. 돈을 달라는 뜻이었다.

지난해 11월 공정거래위원회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블로그에서 공동구매를 알선하거나 돈을 받고 리뷰를 써 수억 원대의 수익을 거둔 파워블로거 4명에게 처음으로 과태료를 부과했다. 블로그에서 상업적인 활동을 하면 소비자에게 알려야 한다는 가이드라인도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업에서 뒷돈을 받고 이를 고지하지 않는 블로거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일부 기업은 이들을 활용해 마케팅을 하는 공생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다. 파워블로거를 사칭해 기업을 협박하는 ‘블랙블로거’나 무전취식 등으로 자영업자들을 울리는 ‘블로거지’(블로거와 거지의 합성어)도 많다.

○ ‘이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홍보 글

그래픽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그래픽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주방가전을 홍보하는 A 씨는 주부 블로거 관리가 주 업무다. 제품 리뷰 한 건에 10만∼20만 원을 준다. 기업으로선 큰돈이 아니다. 이들의 사용후기와 평가가 가전제품을 사는 주부 고객들의 구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A 씨는 “50만 원 정도만 있으면 인터넷상의 소비자 수만 명에게 홍보할 수 있어 기업들은 블로거 마케팅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블로거 마케팅이 효과가 있는 것은 소비자들이 블로그에 올라온 제품 사용후기는 광고와 다르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처럼 평범한 사람이 쓴 글이라고 생각해 친근하게 여긴다. 한 건강식품 홍보담당자는 “파워블로거 중에는 유독 ‘××맘(mom·엄마)’이라는 별명이 많다. 자신의 아이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면 보는 사람들이 더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소비자들은 지난해 ‘베비로즈’ 등 파워블로거들이 몰래 수익 활동을 한 것으로 드러나자 배신감을 느꼈다. 살림 잘하는 이웃 언니 같았던 블로거가 실은 자신의 인기와 지지도를 이용해 돈을 벌었다는 데 분노를 느낀 것이다. 하지만 뒷돈을 받고도 이를 공개하지 않는 블랙블로거는 줄지 않고 있다. 도리어 블로거 여러 명을 관리하며 이들을 파워블로거로 집중 육성하는 마케팅 회사들이 생겨날 정도다.

처음에는 선한 의도로 정보를 나누려고 블로거가 됐지만 기업들이 접근해 블랙블로거가 된 사례도 적지 않다. 하루에 적게는 1000명, 많으면 수만 명이 방문하는 네이버 공식 지정 ‘파워블로거’ 500여 명의 목록을 분야별로 갖고 있는 기업도 있다. 특히 IT 기기, 미용용품, 맛집, 식품, 자동차 분야가 주요 타깃이다. 블로거 마케팅업계 관계자는 “일부 대기업은 블로거에게 각서를 쓰라고 요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각서에는 ‘신제품 정보를 미리 올리지 말 것’ 등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부정적일 수 있는 내용은 쓰지 말 것’이라는 내용도 있다.

파워블로거는 블로그 운영 자체가 직업인 이들도 많다. 그래야 포스트당 수십 장에 이르는 사진과 적지 않은 분량의 글을 매일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유혹에 쉽게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순수한 ‘이웃’의 평가인 줄로만 알고 물건을 산 소비자만 고스란히 피해를 보는 것이다.

○ 파워블로거 사칭, 협박, 무전취식도

최근 한 화장품 홍보대행사 직원은 황당한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파워블로거인데 체험행사에 왜 초청을 안했느냐면서 선물을 보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사용 후기 계획서’를 미리 보내고 높은 값을 부르는 이도 있었다. 또 다른 IT 업체는 블로거 마케팅을 그만두려다 악성 리뷰 글이 인터넷상에 갑자기 퍼지는 바람에 진을 빼기도 했다.

인터넷 ‘빅 마우스’로 통하는 파워블로거의 영향력이 워낙 크다 보니 기업과 중소상인들은 “나 파워블로거인데”라는 말에 벌벌 떨 수밖에 없다.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음식점을 망하게 하겠다’ ‘너희 신제품은 이제 끝났다’며 악을 쓰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파워블로거를 사칭하며 소상공인을 울리는 이들이다. 카메라를 들고 카페, 횟집, 와인바 등을 찾아가 공짜로 음식을 먹는 이들을 두고 ‘블로거지’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다.

지난달에는 한 와인바에 와인 동호회 회장이 “와인 한 박스를 들고 와 마시겠다. 코키지(손님이 와인을 들고 와서 마실 때 내는 서비스료)는 무료로 해달라”고 요구한 사실이 트위터에 퍼지면서 ‘동호회거지’라는 말까지 나왔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실제 파워블로거가 아니어도 ‘망하게 만들겠다’고 협박하면 기업으로선 떨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채널A 영상] 공동구매 주선한 파워블로거, 알고보니…

:: 뉴미디어 스나이퍼(New-media sniper) ::

뉴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사이비 언론이나 블로그 등이 특정 기업을 공격하며 여론을 주도하는 ‘스나이퍼(저격수) 공격’을 한다고 해서 붙여진 용어. 미국 경영전문지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2010년 12월호에 실린 ‘평판 전쟁(Reputation Warfare)’ 논문에 소개된 개념이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장선희 기자 sun10@donga.com  
#뉴미디어 스나이퍼#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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