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바이오산업 기반=유전자 조절 기술을 개발하는 벤처기업 A사에 근무하던 김모씨(34)는 지난달 회사를 떠났다. 자금이 말라 문을 닫기 직전인 A사에서 근무해봤자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2000∼2002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최근 일자리를 잃은 유전공학자는 대기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H그룹은 지난달 연구소 안의 바이오 연구개발팀을 해체했다. 이 팀에서 연구하던 40여명의 유능한 인력들은 미국 등 선진국으로 되돌아가거나 국내에서 일거리를 구하고 있다.
이런 인력들은 취약한 기초 기술, 영세한 시장 규모, 산업 인프라 부족으로 열세를 면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한국의 유일한 경쟁력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들이 바이오업계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이 때문에 연구개발을 중단한 기업도 최근 늘어나고 있다. 바이오신약 후보 물질을 발굴하던 벤처기업인 B사는 유기합성 전문 인력 3명이 국책 연구기관으로 한꺼번에 옮겨가는 바람에 약물 효과 실험을 못하고 있다.
바이오 전문 인력의 유출은 벤처기업의 자금난, 대기업의 비관적인 사업 전망에서 비롯됐다. 한국산업기술평가원 이상기 단장은 “2002년 이후 투자가들이 바이오 분야를 외면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벤처기업이 성장 동력을 잃었다”고 전했다.
한국바이오벤처협회에 따르면 코스닥 시장 등록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 바이오벤처기업은 2001년 9개였으나 지난해 2개, 올해에는 1개로 줄었다.
또 바이오벤처기업에 초기 자금을 투자한 벤처캐피털은 2002년 30여곳이었으나 올해에는 KTB네트워크 한국기술투자 등 4곳으로 급감했다.
핵심 인력 유출에다 자금난이 겹치면서 상당수 기업은 문만 열어놓고 연구개발 활동을 중단한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가고 있다.
2002년 600여개에 달하던 바이오벤처기업은 올해 들어 450여개로 줄어들었으며 이 가운데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고 있는 벤처기업은 10여개에 불과하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이대로 가면 바이오 후진국=한국의 바이오산업이 위축된 동안 바이오산업 후발 주자였던 중국과 인도는 한국 수준을 앞질러 갔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중국은 바이오기술을 응용해 최근까지 15종의 신약을 개발했다. 한국 기업이 지금까지 개발한 신약은 모두 8종이다.
인도도 최근 연간 매출 1조원이 넘는 바이오기업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반면 국내 바이오 1위 기업인 LG생명과학의 작년 매출액은 1739억원이었다.
미국 등 선진국의 바이오산업은 지난해까지 진행된 HGP를 계기로 이미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선진국 바이오벤처기업들은 매출 신장과 인수합병으로 대형 제약회사로 변신하고 있다. 빈혈치료제 에포겐을 개발해 ‘바이오스타’가 된 미국의 암젠사(社)는 지난해 세계 10위 제약회사로 성장했다. 암젠의 연간 연구개발비는 1조원대로 한국 정부의 바이오 투자비보다 많다.
선진국에서는 유전자 치료나 신약 개발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는 기반기술 제공업체, 신약 후보 물질을 초기 단계에서 개발해 대형 제약사에 파는 기술 전문기업, 기술 판매까지 전담하는 대형 바이오업체들이 ‘가치 사슬’을 형성해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고 있다.
▽대책을 찾아라=바이오산업은 정보기술(IT)과는 달리 10년 이상 장기간 기술을 개발해야 하기 때문에 투자 회수 기간이 길고, 충분한 인프라를 갖춰야 성장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각국 정부는 이런 점을 감안해 바이오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선정하고, 집중적인 자금 지원으로 장기 투자에 따른 위험은 정부가 부담해 왔다.
한국 정부도 경쟁력을 갖춘 기업에 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 특단의 바이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재윤 수석연구원은 “국내 바이오벤처기업이 위기를 맞으면서 지금까지 축적됐던 산업의 기반이 붕괴될 수 있다”며 “장기적인 투자 정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 연구소는 최근 내놓은 보고서에서 유전자 치료제 바이오칩 U-헬스 IT 융합 등 한국이 강점을 갖고 있는 분야를 중점 육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벤처기업도 신약 개발이나 유전자 치료 등 산업화 최종 단계에 이르기 전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1992년 설립된 바이오벤처기업인 바이오니아의 박한오 사장은 “벤처기업들이 정부의 자금지원만 기다리지 말고 기술 수출 등으로 활로를 찾거나 연구개발을 위해 돈을 벌 수 있는 분야를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위용기자 viyonz@donga.com
▼BIO 한국 그래도 희망은 있다▼
‘꺼져가는 희망은 우리가 일궈낸다.’
국내 상당수 바이오벤처기업들이 벤처 거품이 빠진 뒤 핵심 인력 유출과 자금난으로 동면 상태에 들어갔지만 경쟁력을 갖춘 일부 기업은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골다공증을 치료할 후보 물질을 찾아낸 오스코텍, 줄기세포를 연구해 세포치료제를 개발하는 메디포스트, 유전체 연구 장비를 수출하는 바이오니아 등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살려냈다.
올해 초에는 LG생명과학이 개발한 항생제인 ‘팩티브’가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아 한국이 11번째로 세계적인 신약을 개발한 국가로 떠올랐다. 팩티브의 시장 가치는 최소 2000억원으로 추정된다.
또 서울대 황우석 교수팀은 세계 최초로 인간의 체세포를 복재해 배아줄기세포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배아줄기세포가 유전자 치료 등에 이용될 경우 한국은 이 분야에서 선두를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오스코텍이 개발한 치과용 뼈 이식 재료는 올해 미국 FDA에서 인증을 받은 뒤 유럽으로 수출되고 있다.
이 회사는 바이오 기술을 통해 골다공증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신약 개발 중간 단계에서 뼈 이식 재료를 내놓아 자금난을 극복했다. 지난해 흑자로 돌아선 이 회사의 올해 매출 예상액은 40억원이며 내년 목표는 100억원. 메디포스트는 난치병에 대비하기 위해 탯줄에서 혈액(제대혈)을 채취해 보관해 두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급성장한 기업이다. 제대혈 속에 있는 줄기세포는 뇌 연골 심장 척추 등이 손상됐을 경우 손상 부위를 재생하는 치료제로 사용될 수 있다.
바이오벤처기업들이 불황을 겪었던 2002년 메디포스트는 매출액 132억원으로 전년도 대비 1000% 성장했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액은 309억원, 올해 목표는 550억원.
바이오니아는 수출을 통해 활로를 개척하고 있는 기업이다. 국내 바이오벤처 1세대인 이 회사는 생명공학 연구에 사용되는 합성 DNA를 생산해 일본 유럽 등 선진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바이오니아의 올해 수출액은 12억원을 돌파하고 매출액도 1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주요 의약품 특허기술 수출 | ||||
수출 기업 | 연도 | 수출 국가 | 수출 대상 | 기술료 또는 수출 조건 |
㈜SK | 2000 | 미국 | 우울증 치료제 | 4900만달러 |
종근당 | 2000 | 미국 | 항암제 | 3000만달러 |
태평양 | 2004 | 독일 | 진통제 | 1억1175만유로 |
LG생명과학 | 2004 | 미국 | B형간염 치료제 | 3000만달러 |
팬제노믹스 | 2004 | 미국 | 항알레르기 | 210만달러 |
유진사이언스 | 2004 | 미국 | 콜레스테롤 저하제 | 연간 200원∼300억원원료공급 |
자료:각 기업 |
정위용기자 viyonz@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