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들에게는 슈퍼컴퓨터가 이처럼 기상청의 일기예보에 쓰이거나 최첨단 과학연구를 위한 설비쯤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슈퍼컴퓨터도 일종의 컴퓨팅파워의 하나이다. 개개인이 사용하는 PC가 데이터 관리, 자료 송수신, 그래픽 작업, 계산 작업을 수행하는 것처럼 슈퍼컴퓨터도 마찬가지의 일을 한다. 다만 연산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고 일반 PC로는 몇 년이 걸릴 업무를 몇시간만에 처리해낸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같은 차이가 조만간 일국의 정보통신, 나아가 경제 전체의 경쟁력을 좌우할 만큼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것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비록 IMF사태를 겪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경제는 그 규모면에서 세계 10위권에 달하는 등 외형적으로는 가파른 성장을 이루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향후 우리 경제의 질적인 비약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IT인프라의 영역을 들여다보면 상황이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다. IT인프라의 핵심이라 할 슈퍼컴퓨터의 경우, 지난해 말 현재 세계 슈퍼컴퓨터 TOP 500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슈퍼컴퓨터 성능합계 비율은 전세계의 0.7% 수준이며, 미국의 1/82, 일본의 1/22 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 동안 슈퍼컴퓨터는 물리, 화학, 천문학, 기상학 등 자연과학분야와 구조해석, 환경영향 연구, 자동차 설계 및 충돌실험, 유전탐사, 시뮬레이션 등 공학분야에서 다양하게 이용되어 왔으며, 슈퍼컴퓨터 보유 성능의 차이가 국가간 과학기술의 차이, 국가 경쟁력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본적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슈퍼컴퓨터는 기본적으로 '인프라'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생활 속에서 직접적으로 그 중요성을 체험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우리가 생활하면서 듣고 보는 거의 모든 분야, 가령 영화속의 특수효과와 애니메이션, 인간 게놈 연구로부터 자동차, 고층빌딩 등의 설계와 디자인, 수백만 회원을 가진 온라인 커뮤니티의 데이터 관리 등에서 슈퍼컴퓨터의 효용은 발휘되고 있다.
영화의 경우를 보자. 쥬라기공원, 타이타닉, 개미 등과 같은 허리우드 대작들의 흥행 성공은 탄탄한 기획력 못지 않게 특수효과와 컴퓨터 그래픽에 힘입은 바가 크다. 마치 바로 옆에서 뛰어다니는 것같은 중생대 공룡들, 남극의 바다속으로 서서히 침몰하는 거함 타이타닉, 그리고 수천 수만 마리의 개미들이 저마다 다른 생김새와 표정을 보여주는 화면들은 슈퍼컴퓨터의 발전 없이는 영상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장면들이다.
생물정보학(Bio Informatics)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유전자 정보를 가공, 처리하여 유전병의 진단 및 치료, 신약 개발에 기여하는 과정에는 방대한 양의 정보를 빠른 시일내에 처리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30억 쌍이나 되는 염기서열의 양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데이터들을 처리하는 문제는 워크스테이션급 컴퓨터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과제들이다.
지난해부터 국내에서도 민간 차원의 슈퍼컴퓨터 개발이 활발해져 클러스터링 방식의 병렬형 슈퍼컴퓨터를 개발, 활용하는 사례가 확산되고 있다. 민간 기업에서 개발, 활용하는 병렬형 슈퍼컴퓨터는 성능면에서 기존의 벡터형 슈퍼컴퓨터보다 우수하면서도 가격경쟁력이 월등히 뛰어나 수십, 수백억원대의 벡터형 슈퍼컴퓨터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다.
하지만 이같은 민간 슈퍼컴퓨터 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극히 제한적이며 일부 국책기관에만 그 임무가 주어진 상태이다. 모든 산업분야가 그러하듯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민간의 노하우가 결합될 때 최상의 시너지 효과가 발휘될 수 있다. 슈퍼컴퓨터 산업에 대해 정부는 다음과 같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줘야만 한다.
우선, 슈퍼컴퓨터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전환이다. 슈퍼컴퓨터는 IT산업의 한 영역이 아닌 최첨단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을 위한 기본 인프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마치 항만, 도로, 전력 등 사회간접자본과 같이 그것이 없이는 산업 전반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토대인 것이다.
두 번째로 경기의 부침과 상관없이 슈퍼컴퓨터 산업에 대한 지원방안을 세우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인프라로서의 슈퍼컴퓨터는 불황의 시기에 호황을 앞당기는 기본 토양으로서 더욱 빛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최근 슈퍼컴퓨터 관련 산업은 다른 분야에 앞서 투자의 물꼬가 트이고 있다. 지난해 벤처의 몰락과 투자위축의 시기를 겪으면서도 슈퍼컴퓨터 산업에 대한 신념과 자신감으로 기술개발 및 마케팅에 매진해온 관련 업체들로서는 대단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여기에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정책적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나라가 IT 선진국으로서의 입지를 굳히는데 금상첨화의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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