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다]낮엔 프로그래머
밤엔 킥복서…안철수연구소 정덕영씨

  • 입력 2001년 2월 11일 18시 44분


박치기 김일 선수가 영웅으로 떠올랐을 때 생뚱맞게도 반칙의 일인자인 ‘울트라 타이거마스크’를 좋아하던 소년이 있었다. 어눌하고 소심한 은행원 임대호. 하루가 멀다하고 상사에게 깨지는 신세…. 이 평범한 샐러리맨이 어느날 밤 레슬러로 변신한다. 이 남자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영화 ‘반칙왕’ 홈페이지·www.foul.co.kr에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업체 안철수연구소에서 일하는 정덕영씨(사진). 그는 백신 프로그램의 핵심인 ‘시스템 감지기’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얼핏 보기엔 그도 평범한 벤처회사 직원. 버스를 타고 아침 10시까지 출근.(프로그래머들은 야근이 잦아 출근시간이 늦다) 하루종일 프로그램 짜고 밥먹고 또 일하고…. 온종일 컴퓨터와 씨름한 후 새벽 1, 2시가 되어서야 사무실에서 나선다. 프로그래밍 일이 바쁠 땐 모두가 컴퓨터 앞에 붙어 있는 그의 사무실은 ‘재봉틀공장’을 방불케 한다.

하지만 그의 삶엔 다른 점이 있다. 그는 놀랍게도 밤이 되면 킥복서로 돌변한다. 영화 속에서 은행원 임대호(송강호)가 ‘이중생활’을 했던 것처럼….

“저녁식사 시간에 짬을 내 도장에 들르죠. 요즘엔 바빠 일주일에 두세번 정도밖에 못 갈 때가 많아요. 그래도 관장님 일 도와드리고 후배들과 샌드백을 두드리고 나면 가슴이 후련합니다. 시스템 문제로 고민하다 운동을 하고 오면 용하게 해법이 보이더라고요.”

사실 덕영씨의 킥복싱 실력은 ‘프로’ 수준이다. 그는 중학교 때 입문한 합기도(4단)에 이어 5년 정도 킥복싱을 했다. 안연구소에 들어오기 전엔 사설경호원이 되기 위해 2달 동안 교육을 받기도 했다. 기자가 ‘싸움 잘하시겠네’ 하자 “뭐, 그냥 어디 가서 맞고다니진 않지요”라며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요즘 그는 일주일에 두 번 동료직원들에게 킥복싱을 가르친다. 그의 회사내 ‘제자’는 8명. 남녀가 반반씩이다. 강좌시간엔 찍기, 꺾기, 조르기 등 ‘살벌한’ 용어가 난무한다. 원래 킥복싱이 실전위주의 무술이라 부상위험도 높다. 특히 여자직원들의 경우 운동을 ‘살살’ 시키려 노력한다. ‘뱃살 뺄 정도로만’이 그가 고수하는 가이드라인.

“가끔 홍대앞 테크노바에 가는데 이젠 직업이 프로그래머라고 말하지 않아요. 멀쩡히 춤 잘 추던 여자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더라고요. 이젠 프로그래밍이란 일에 대한 선입견이 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건장한 청년을 이상하게 보다니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시종 씩씩한 모습을 보이던 그가 마지막으로 들려준 좀 ‘엉뚱한’ 고민이다.

<문권모기자>africa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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