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그를 봤을 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는 배낭에서 약병을 꺼내 책상 위에 ‘꽝’ 내려놓았다. 놀랍게도 약병에 붙은 약 이름은 라미실이었다. 약은 발음뿐 아니라 둥글고도 하얀 알약 모양도 라믹탈과 비슷했다.
지난번에 처방전 사고로 약사가 리자에게 무좀을 치료하는 항진균제를 줬던 것이다. 그의 우울증이 도지기 시작한 이유가 한번에 드러났다.
리자와 같은 경우는 드물지 않다. 1996∼2001년 미국 약전 처방 오류 보고서에 따르면 철자와 발음이 유사해서 조제 때 실수한 경우가 전체 약 사고의 15%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경련억제제 세레빅스와 소염진통제 세레브렉스, 항히스타민제 자이텍과 궤양치료제 잔탁, 항우울제 사라펨과 불임치료제 세로펜 등이 포함된다.
어떤 처방은 전화로 이뤄지고 또 일부는 손으로 써서 처방하기 때문에 의사의 불분명한 발음이나 악필 때문에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두 약이 발음이 비슷하면서 모양도 비슷하면 리자의 경우와 같은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에 미국 식품의약국은 전문가집단을 통해 약 이름을 검토하도록 하고 있다.
식품의약국 약품안전부의 제리 필립스 부장에 따르면 92년 이후 소리가 비슷하거나 모양이 비슷한 600쌍의 약이 승인을 받았다. 미국에서 등록된 약이 모두 1만5000개라는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수다. 이 때문에 어떤 약들은 이름을 새로 달기도 한다. 궤양 치료제 로섹은 이뇨제 라식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프리로섹으로 이름을 바꿔야만 했다.
식품의약국은 매년 300여 개의 새 약의 이름을 검토해서 3분의 1의 이름을 시판 전에 바꾸도록 하고 있다.
올해에만 해도 일라이 릴리의 새 주의력결핍장애 치료제 토목세틴의 이름을 항암제 타목시핀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아토목세틴으로 바꾸도록 했다.
식품의약국은 약사와 간호사에게 직접 약을 고르도록 해서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도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약 이름 때문에 생기는 사고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식품의약국은 93∼98년 이 때문에 52건의 사망사고가 생겼다고 집계했으며 드러나지 않은 사고를 합치면 이로 인한 피해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약 이름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까. 약 이름은 시장논리와 심리학의 복합 산물이다. 대부분의 약은 상품명 전문가가 만든다. 이 분야 전문가인 레베카 로빈스에 따르면 보통 신약 하나에 이름 값으로 100만달러(약 12억5000만원) 정도가 든다.
로빈스 박사는 “좋은 약 이름은 힘, 긍정성, 삶의 질 향상 등을 암시하고 부정적 이미지를 피한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알레르기 치료제인 클라리틴은 ‘Clarity’(깨끗함)와 연관돼 알레르기에서 벗어난 깨끗한 날을 떠올리게 한다.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의 이름에서는 나이애가라 폭포를 떠올릴 수 있고 성적으로 나이애가라 폭포처럼 활기찬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약 이름이 비슷할까. 철자가 ‘z’나 ‘x’로 시작하는 발음은 역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이어서 선호된다. 반면 요즘에는 과장된 이미지를 피하기 위해 ‘슈퍼’ ‘엑셀’ 등을 약 이름에 넣지 않는 경향이 있다.
만약 약의 이름이 비슷해지는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급적 의사에게 컴퓨터로 처방해서 인쇄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괴발개발 쓴 글씨를 당신이 도저히 못 알아본다면 약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www.nytimes.com/2003/03/11/health/policy/11CASE.html)
정리=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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