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던 아랍에미리트의 부호 압둘라지즈 알 나잘 씨(61)는 올 8월 5명의 부인, 9명의 자녀와 함께 자가 비행기로 독일 뮌헨을 찾았다. 일차적으로는 세계적 수준의 의술을 갖춘 뮌헨대병원에서 인공판막수술을 받기 위해서지만, 겸사겸사 가족들의 건강도 챙기려는 목적도 있었다. 일종의 럭셔리 가족 의료관광에 나선 것.
나잘 씨가 뮌헨대병원 특실에 3주가량 입원하는 동안 가족은 뮌헨의 특급호텔의 스위트룸에 머물렀다. 서열이 높은 첫째 둘째 부인과 자식들은 5성급, 셋째부터 다섯째 부인은 4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을 이용했다. 이들은 각각 호텔 안에 위치한 검진센터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부인들은 간단한 성형 수술, 피부 시술, 비염 치료 등을 받았다. 남은 시간 가족들은 뮌헨 인근의 노이슈반슈타인 성 등 유명 관광지를 돌고, 쇼핑도 했다. 나잘 씨 가족은 3주 동안의 가족 의료관광에 2억 원가량을 썼다. 나잘 씨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받으면서 가족 건강을 챙기고 휴양까지 즐길 수 있는 뮌헨은 중동 부호들에게 낙원이다”라고 말했다.
○ 환자·가족 위한 병원-호텔 연계시스템
뮌헨은 중동 사람들에게 ‘죽기 전에 반드시 가봐야 하는 최후의 보루’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기술을 갖고 있다. 특히 사막기후 아래서 운동을 잘 하지 않는 중동 사람들은 심장질환, 암, 비만, 척추 및 무릎관절 질환 환자들이 많지만 의료 서비스의 질은 낮다. 로베르트 겔 독일 바이에른 주 국제보건산업협회장은 “죽어도 좋다는 각서를 본국에 쓰고 뮌헨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뮌헨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중증환자의 가족을 위한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중증환자는 뮌헨대병원같이 세계적인 병원에 입원하고, 가족들은 주변 4, 5성급 호텔에 머물며 간단한 시술뿐 아니라 건강검진, 관광, 쇼핑을 즐기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독일에는 호텔 안의 병원이 성행하고 있다. 4성급인 아라벨라 셰러턴호텔 9층은 아라벨라 클리닉이 운영되고 있다. 중동 환자의 가족들은 호텔에 머물면서 이비인후과, 안과, 정신과, 수면클리닉, 성형외과 진료를 받는다. 아라벨라 클리닉의 피터 스놉콘스키 부사장은 “화재 위험 등에서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수술실과 입원실은 1층에 별도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설명했다.
중동 환자들을 위한 특급 호텔들의 서비스도 진화하고 있다. 객실의 30%를 중동 사람이 사용하는 만다린오리엔탈 호텔의 경우, 뮌헨대병원에 입원한 환자를 위해 식사를 매끼 배달한다. 환자를 위한 저염식 식단과 중동 현지식 등 다양한 메뉴를 구비하고 있다.
유럽 지역을 관할하는 김수웅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영국지사장은 “한국은 상급종합병원의 1인실 외국인환자 의무 비율이 폐지돼 VIP 환자가 늘고 있지만, 가족 숙박 연계 시스템은 부족하다”며 “독일의 병원과 호텔의 연계 시스템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중동 환자가족, 특급호텔 스위트룸 싹쓸이
실제로 여름 휴가철이 한창인 8월 뮌헨의 특급호텔 로비에는 하얀색 중동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1박에 평균 1000유로(약 133만 원)가 넘는 스위트룸의 약 70%를 중동 사람들이 사용한다. 독일 바이에른 주 보건부에 따르면 중동 환자들은 1인당 하루 평균 350유로(약 47만 원)가량을 쓴다. 평균 10명의 가족이 함께 오기 때문에 하루 평균 3500유로(약 470만 원)를 쓰는 셈.
겔 회장은 “중동 환자들이 독일 특급호텔 매출의 30%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 이들이 없다면 경영난을 겪을 호텔도 많다”며 “중동 환자들이 뮌헨 서비스산업의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 강국 독일의 강점을 살린 의료관광 상품도 있다. BMW는 뮌헨에서 신차를 인수하고, 그 차를 이용해 코디네이터와 함께 독일 전역을 여행하면서 병원을 이용하는 10억 원대 프로모션 상품을 구비하고 있다. 치료가 끝나면 차는 배를 통해 본국으로 보내고, 환자는 비행기를 타고 귀국한다.
독일은 한국처럼 정부 주도로 보건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있지는 않다. 독일을 방문한 의료관광객 수에 대한 정확한 통계조차 없을 정도.
하지만 독일 의료관광 업계에 따르면 한국의 지난해 해외환자 유치 실적(약 21만 명)과 맞먹는 매년 약 20만 명의 해외 환자(외래 환자 12만 명, 입원환자 8만 명)가 꾸준히 방문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중증질환 의료기술, 가족을 위한 연계 프로그램, 천혜의 관광자원이 시너지를 내면서 미국과 함께 전 세계 의료산업을 이끄는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로베르트 아우레스 독일 바이에른 주 보건부 보건산업 담당 국장은 “방문객 수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족과 함께 방문해 많은 돈을 쓰는 중동의 중증환자들이 독일로 온다는 것이 중요하다”며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독일 사람과 똑같이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게 의료강국 독일의 최대 강점이다”라고 전했다.
▼ “한국, 박리다매 환자 유치로는 성장 어려워” ▼
유럽 전문가들이 말하는 문제점
정부가 의료관광 산업을 육성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해외 환자들이 한국에서 진료를 받으면 내국인보다 적게는 20∼30%의 돈을 더 지불한다. 불법 환자 브로커를 통해 입국할 경우 그 액수가 더 커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내는 돈에 비해 제대로 된 서비스는 제공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해외 환자가 자국에서 보험에 가입하고 한국 병원을 찾는 경우는 전체의 10%에 불과하다. 이들 중 대부분은 미국 국적의 한국 동포들이다. 거의 대부분의 외국 환자가 보험 가입 없이 한국을 찾는 셈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외국인 환자들은 한국에서 의료사고를 당해도 제대로 보상받기 어렵다.
독일에서 만난 의료산업 전문가들은 한국이 덤핑식 환자 유치를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마커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는 “한국 의료계가 외국에서 오는 환자도 결국 내국인과 같다고 인식하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성장이 어려울 것이다”라며 “의료사고에 대비한 보험 가입을 늘려야 한다”고 진단했다.
자국 병원에서 보험에 가입한 해외 환자들이 한국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도, 보험 혜택을 더 줄 수 있게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는 전문가의 지적도 많다. 현재 다수의 다국적 보험사는 한국의 일부 대형병원에서 진료를 받았을 때만 보험 혜택을 주고 있다.
중국 일본 등 근거리 환자들을 위한 배려 확대도 필요하다. 유럽연합(EU)에서는 자국 주치의의 승인만 있으면 아무런 제약 없이 EU 국가 어디든 방문해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실제로 독일어 문화권인 이탈리아 북부 티롤 지방에서 산악 스키사고를 당한 환자들은 오스트리아, 독일 뮌헨 등 병원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환자 가족을 위한 프로그램도 보완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독일 뮌헨처럼 특급호텔들이 전략적으로 대학병원들과 제휴하는 것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것. 한국에서는 서울성모병원과 메리어트호텔의 VIP 환자 가족 숙박 제휴 프로그램 등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이용률이 낮은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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