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일본 춘소프트·98년 출시)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임이다. 이 게임은 조금은 생소한 사운드 노벨이라는 장르의 게임이다. 화면 가득 나오는 이야기를 책을 읽듯 읽어나가다 가끔 나오는 분기점에서 선택을 해주면 된다. 그러다 보면 하나의 단편 소설이 완성된다.
‘거리’는 시작할 때 나오는 여덟 명 중 한 명을 선택해 이야기를 시작한다(나중에 한 명이 추가된다). 귀국한 외인 부대원 같은 특이한 사람도 있지만 대개 쉽게 만날 수 있는 그저 그런 사람들이다. 게임을 좋아하는 소년계 형사, 야쿠자, 악역 전문 조연, 뚱뚱해서 애인에게 차인 여성, 핸섬해서 인기 좋은 남자 고등학생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무 관계없이 서로 스쳐지나갈 뿐인 사람들을 묶어주는 건 그들이 사는 거리다. 이들은 모두 ‘시부야’ 거리를 지나간다. 그 거리에서 부딪히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인연을 맺는다.
인연을 맺는다고 해서 거창한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다. 그냥 우연히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러다 쇼핑백이 바뀌는 것 같은 작은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소한 일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삶을 조금은 바꿔놓는다. 운이 나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며칠 동안 벌어지는 작은 만남과 작은 사건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는 지구 정복을 노리는 대마왕이나 이를 저지할 운명의 용사 같은 건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 게임에 매달린다. 어차피 늘 겪는 삶을 게임에서까지 찾아간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살다 보면 선택을 해야 할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선택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걸 선택하든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우연히 주운 종이 한 장이 나의 인생과 세계의 운명을 바꿔놓는 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들, 보통 사람의 삶의 이야기들은 인생을 화려하게 빛내 줄 만한 일이 절대 될 수 없다. 기껏해야 신문 사회면에 한 줄짜리 기사로 실리고 사라져버릴 정도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한심한 삶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삶의 즐거움은 일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화려한 사건에 있지 않다. 어이없는 일들, 대단치 않은 일들이 중요하다. 사람을 잘못 보고 달려들었다가 봉변만 당하거나, 애인에게 차여 다이어트를 하다가 홧김에 더 먹어 살이 더 찐다든가 하는 게 인생이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은 그런 일들로 가득차 있고, 그 즐거움에 의해 삶이 위안받는다. ‘거리’를 플레이하면 그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발견한다.
(게임평론가)SUGULMAN@chollian.net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