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억수같이 오던 날, 누나 윤희(성유리)는 다리에서 떨어졌다. 동생은 누나를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었지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가슴에 담은 누나. 학교 급식 보조원으로 일하던 윤희는 골목길에서 불량학생 진호(이주승)에게 지갑을 빼앗긴다. 두 사람은 학교 식당에서 자주 마주친다. 엄마 병원비 때문에 사채를 빌려 쓴 진호는 불량배들의 위협에 시달린다. 두 사람의 인연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진다.
3일 개봉하는 영화 ‘누나’를 관통하는 주제는 상처와 치유다. 자신의 목숨 대신 동생을 떠나보낸 트라우마에 갇힌 윤희는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 질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답답한 삶을 산다. 집에서 그를 반기는 것은 ‘동생 잡아먹은 ×’이라는 아버지의 욕설과 몽둥이 찜질. 멍든 눈가를 안대로 가리듯 세상과 벽을 쌓은 그의 일상에 진호라는 작은 돌멩이가 날아든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병든 어머니 수발을 하며 삐뚤어진 진호는 역설적이게도 윤희에게는 치유의 공간이다. 윤희와 진호의 상처가 만나는 자리에서는 ‘마음의 딱지’가 돋아난다.
영화를 눈 비비며 봐야 할 이유는 성유리의 변신 때문이다. 그는 걸그룹 ‘핑클’ 출신으로 연기자로 나섰지만 평가는 냉혹했다. 2003년 SBS 드라마 ‘천년지애’에서 그가 “나는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다”라고 했던 ‘국어책 읽기’ 대사는 개그 소재로 쓰일 만큼 조롱거리였다. ‘공주 정체성’은 영화에서도 이어졌다. 지난해 ‘차형사’에서 디자이너 역으로 보여준 것은 화려한 의상과 선글라스뿐이었다.
화려한 조명을 가리던 선글라스는 이번에는 그의 맞은 상처를 가리는 장치로 쓰인다. 짧은 치마와 하이힐은 남루한 티셔츠 한 장과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가 대신했다. 예뻐 보이기를 포기한 순간 그의 연기는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상처를 삼키고 안으로 침잠하는 연기를 하기에 그는 아직 부족하지만 공주 껍질을 벗고 나온 것만으로 반길 만한 일이다.
이원식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영화는 2011년 서울기독교영화제 폐막작이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자 신학대 교수를 아버지로 둔 성유리가 개런티를 받지 않고 출연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공주의 벽을 깬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기독교적 에토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 아닐까. 바른 생활, 은혜롭고 안온한 일상의 너머에 있는 거칠고 팍팍한 현실을 스크린에 옮겨 담는 연기자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15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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