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공기에서 그런 깊은 냄새가 느껴지는지. 그런 향기를 간직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는지. 모든 것이 휘발돼 버리는 세상에서 이 영화는 속도전에 휘말린 이 세상의 흐름을 거역하듯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자연과 인간의 그 깊은 향기, 오래 묵어야만 느끼는 향기를 느끼라고 조심스럽게 권한다.
소설가이자 카레이서인 주인공 찬우가 속세와 격절된 산 속의 절 대흥사 옆의 여관에서 지경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여인을 만나 느낀 것도 바로 그 침향이었다.
비극적인 과거를 안고 살며 나이 많은 산장 주인의 둘째 마누라가 되어 속절 없이 아기 낳기만을 기다리는 그녀와의 만남에서 찬우는 그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욕망을 만난다. 군에서 막 제대한 찬우는 입대 전에 관계했던 창녀 선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이 그녀가 자신에게 유언으로 남긴, 유골을 뿌려 달라는 그녀의 생전 소원을 풀어 주기 위해 그곳 대흥사에 온다.
찬우가 진경에게서 본 것은 바로 죽은 선희의 그림자이며 그녀에게서 느꼈던 욕망이며 세속잡사를 초월해 바로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 같은 초월적인 자태에서 느끼는 끌림이다. 현실의 시간과 공간과 격절된 이 초현실적인 곳에서 느끼는 냄새, 그것이 침향이다. 그것은 번잡스럽고 고정된 우리 일상에선 결코 접촉할 수 없는 경지일 것이다.
그러나 침향은 없다. 심지어 영화 <침향>에서 조차도. 김수용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이 도달할 수 있는 이미지의 깊이는 당대 최고의 것이었다. 60년대에 이미 <안개>, <까치소리> 등의 영화에서 김수용은 이미지로 이야기를 초월하는 경지에 올라섰으며 정일성은 그런 그의 미학을 가장 온전히 화면에 옮겨놓을 수 있는 촬영감독이다.
과연 <침향>의 이미지는 관광엽서나 광고화면의 예쁜 치장에 익숙한 감성으로도 탄복할 수 있는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그것은 단순히 감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체험에서 훈련된 직관으로만이 찰나를 고정시킬 수 있는 장인의 역량으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미 오래 전에 60년대부터 이미지로 영화를 장악했던 노 거장이 어찌하여 부질없이 스토리 텔링에 매달리려는 몸짓을 취했느냐는 것이다. <침향>은 침묵이 필요한 순간에도, 이미지의 카리스마로 압도할 수 있는 순간에도 관객이 혹시 이야기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지나치게 배려하는 연출 계산에서 쉴새 없이 대사가 깔린다.
이런 대사를 통한 설명, 이야기에의 강박감은 김수용 감독의 장기가 아니었다. 그는 60년대와 70년대를 통틀어 흔히 문예영화라 불리던 장르 아닌 장르에서 문학의 품격을 온전히 영화의 시각적 언어로 번역할 수 있었던, 한국영화의 현대화를 이끌어냈던 감독이었다.
한국영화계는 이 노 거장이 숨 쉴만한 공간을 허용해주지 않았고 감독은 저 예산의 고통과 싸우면서 제작 중단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 서둘러 영화를 찍었다. 이 고색 창연한 이야기에 관객이 관심 갖기를 바라는 한 가닥 희망을 갖고.
원래 예정됐던 각본에 완성된 영화는 몇 가지 요소를 첨가했다. 소설가였던 주인공 찬우는 소설가이자 카레이서로 설정이 바뀌었다. 소설가라는 직업이 주는, 뭔가 불가해한 일에 맞닥뜨릴 수도 있는 예술가라는 설정에 속도를 추구하는 현대의 삶에 걸맞는 새로운 직업이 추가된 것이다.
카레이서로서 그가 느끼는 속도와 나중에 시골 절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다르다. 그 대비되는 속도관념은 입대 전에 관계했던 창녀 선희의 죽음을 계기로 찬우가 선희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 절 대홍사로 향하는 설정과 잘 어울린다.
또, 거기서 합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성적 욕망의 우여곡절을 겪는 전개와도 잘 들어맞는다. 요컨대 이 영화는 현실의 시간을 넘어서서 관념의 시간, 어떤 다른 시간대로 진입하는 낯설고 초월적인 경험이다. 그러나 높은 관념에 비해 영화는 몇 개의 맞물리지 않는 조각으로 나뉘어 버렸다.
신비한 화면의 풍광은 종종 감정 몰입을 방해하는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와 설명조의 대사 때문에 흥이 깨진다. 영화는 물리적인 재현을 거쳐야 하는 그 번거로운 과정을 돌파하지 못했다. 특히 화면에 신비하고 초월적인 기운을 띠어야 할 배우들의 카리스마가 모자라는 것이다.
차라리 죽은 창녀 선희 역의 이정현이 1인 2역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지나간 것은 부질 없다. 영화 <침향>의 전제처럼 지나간 것은 그저 처연할 뿐이고 우리는 이제 이 노감독이 다시 침향을 찾아내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김영진(hawks@film2.co.kr)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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