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오페라에서 상징들은 더러 제 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과잉돼 서로 충돌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자신의 상징들을 포기하는 것은 곧 영화를 포기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영웅본색>으로 홍콩 느와르의 신화를 창조한 오우삼은 이제 먼 길을 걸어 <미션 임파서블 2>로 헐리우드에 안착했지만 그의 상징을 거세하려드는 헐리우드의 부비트랩 속에서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오우삼이 30년 가까이 그런 상징에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모두 그의 인생에서 배태된 것이기 때문이다. 1946년 중국 광동성에서 태어난 오우삼은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홍콩으로 이주한다. 병약한 아버지 탓에 성당의 기부금을 받으며 자란 그는 범죄가 일상사가 돼버린 슬럼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집 앞에 널부러진 시신을 보면서 충격에 빠지기도 했던 오우삼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한때 갱 조직에 간여하기도 했다. 다행히 성당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안정을 찾게 된 소년 오우삼은 그러나 또 한 번 좌절한다. 성직자가 되고 싶었던 그는 "신부가 되기에는 너무 자유로운 정신을 가졌다"는 말을 신부에게 직접 들었던 것이다.
오우삼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사람은 미국영화를 좋아한 어머니였다. 열한 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극장을 드나들던 오우삼은 "그때 나는 뮤지컬에 매료되었다. 프레드 아스테어의 많은 작품을 보면서 영화를 사랑하게 됐고 언젠가 영화 감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토로했다.
변변한 영화교육 한 번 받지 않은 오우삼은 10대에 친구들과 장비를 빌려 촬영을 시작하더니 스물네 살 때인 69년엔 캐세이 스튜디오에서 각본 책임자로 일하게 된다. 3년 뒤 쇼브라더스 스튜디오로 옮겨 홍콩 무협영화의 장인으로 유명한 장철 감독 밑에서 편집을 비롯한 영화의 모든 기술을 배운 그는 73년 마침내 성룡이 액션감독으로 가세한 <철한유정>(鐵漢柔情)으로 데뷔한다.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평가에도 데뷔작이 흥행에 성공하자 오우삼은 소속사를 골든 하베스트사로 옮겨 만든 성룡 주연의 영화 <소림문>(76)으로 영화를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그러나 86년 <영웅본색>을 만들기까지 10년 동안 오우삼은 대만을 오가며 <플레인 제인 구조에 나서다> <부자에서 알거지로> 등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찍으며 세월을 죽여야 했다.
서극이 제작을 맡은 <영웅본색>은 오우삼 뿐만 아니라 홍콩영화의 판도를 뒤바꿔 놓은 영화였다. 코미디 영화의 들뜬 화법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고 내러티브에 치기가 남아 있었지만 이 영화는 홍콩 느와르의 새 장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적 혹은 동지로 만난 남자 영웅 두 명을 통해 오우삼은 쓰레기 더미 같은 세상에 총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우정과 형제애, 그 맞은 편에 배신과 탐욕을 배치한 오우삼은 이 영화에서 자신의 온갖 스타일을 실험했다. 그 실험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슬로우 모션을 빠른 화면과 교차 편집한 것이었다. 폭력영화의 거장 샘 페킨파가 <와일드 번치>의 격렬한 총격전에서 써먹은 수법을 재활용한 오우삼은 슬로우 모션으로 긴장의 순간을 주관적이지만 극적으로 연장시키면서 한편으론 커트를 빠르게 변화시켜 속도감을 유지했다.
슬로우 모션이 여느 영화와 달리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결정적인 순간뿐 아니라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도 배치됐기 때문이다. 관객은 그로 인해 긴장의 순간을 또 한 번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관객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은 것은 총잡이들이 다이빙을 하듯 몸을 날려총을 쏘는 장면이었다.
"뮤지컬에서 춤 장면을 안무하듯 액션을 안무한다"는 오우삼은 그 장면에 "액션의 리듬과 미학과 정서"를 쏟아 부었던 것이다. <영웅본색>은 또 스타일이랄 것도 없는 쌍권총 사격 장면으로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들었다. 정조준할 시간도 필요도 없는 좁아 터진 실내 공간에서 신체 부위에 골고루 총알을 쑤셔 박는 주윤발의 냉혹한 모습은 잔인했고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영웅본색>은 오우삼이 죽을 때까지 안고 갈 스테레오 타입들을 곳곳에 심어 놓았다. 불상 앞에 선 주윤발이 신을 믿냐는 질문에 "내가 신이다"고 말하는 장면은 후속작에서 그가 성당과 비둘기를 자신의 영화에 꾸준히 집어넣을 것임을 예고했다. 오프닝과 엔딩을 성당 장면으로 처리한 <첩혈쌍웅>에서도 드레시한 킬러 주윤발은 총기를 밀매하는 성당에서 신을 믿진 않지만 조용해서 좋다고 말한다.
크리스찬인 오우삼은 헐리우드에서 만든 <페이스 오프>는 물론 <미션 임파서블 2>에서도 자신의 종교관을 고집스럽게 담았다. 어린 시절 삶의 좌표를 제시한 신앙의 힘에 영혼을 맡긴 그는 극단적으로 속(俗)된 인간과 사건들을 성스러운 공간 속에 처넣어 정죄한 것이다. 분위기에 상관 없이 온갖 영화에 비둘기를 등장시킨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성당의 포스터에 비둘기를 그려 넣곤 하던 오우삼은 "흰 비둘기는 내 영화의 캐릭터가 갖고 있는 순결과 사랑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오우삼이 아기를 단골로 등장시키는 것도 그가 세상을 얼마나 비관적으로 보고 있는가를 암시한다. 벤츠를 타면서 폼나게 사는 꿈을 꾸던 친구 3명이 돈 때문에 배신하고 복수하는 <첩혈가두>(90년)에서 양조위는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온 뒤 어린 아들을 만난다. <첩혈속집>(92년)에서 범죄 조직원으로 위장한 전직 경찰 양조위와 함께 무기 밀매조직을 작살내는 주윤발이 신생아를 구출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감수한다.
그것은 가족 우정 믿음 관용 같은 전통의 가치가 모두 사라지고 폭력과 권력과 금력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기대할 것은 새로운 생명 아니면 초인적인 영웅뿐이라는 오우삼의 발언이다.
영웅적이지만 지나치게 낭만적이어서 비현실적인 페르소나 주윤발도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자기 의지에 상관 없이 모든 인간을 타락시키는 현대사회에서 주윤발의 신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경찰이 됐든 킬러가 됐든 세상을 더럽히는 쓰레기를 치워주는 청소부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윤발은 강하지만 차갑고 고독하지만 인간적인 캐릭터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내 영화에서 주윤발을 본다면 당신은 나를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내 모든 것을 주윤발이라는 캐릭터에 담는다." 영화 속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 한 오우삼은 세상을 정화하려는 의지로 '피의 오페라'를 연출한 것이다.
홍콩 느와르의 고전이 된 <첩혈속집>이 어둡고 무거운 주제의식과 반복적인 화법 탓에 기대 만큼의 반응을 얻지 못하면서 오우삼의 행로는 잠시 주춤한다. 관객은 관객 대로 그의 영화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오우삼이 홍콩 영화를 망쳐놓았다는 소리까지 들렸다. 거기다 코미디 <종횡사해>마저 신통치 않자 오우삼은 오래 동안 모색해 왔던 헐리우드로의 진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장 클로드 반담이 주연했지만 자기 뜻대로 만들 수 없었던 <하드 타겟>은 실패로 돌아갔다. 헐리우드의 수업료를 톡톡히 치른 뒤 만든 <브로큰 애로우>로 적응 가능성을 보여준 오우삼은 결국 <페이스 오프>로 옛 명성을 되찾았다.
현란한 액션이 매끄러운 내러티브 속에서 조화를 이룬 이 영화에서 오우삼은 미치광이 폭탄 테러범 니콜라스 케이지와 그를 쫓는 FBI 요원 존 트라볼타를 악과 선을 대표하는 인물로 설정했다. 두 영웅으로 투 톱 시스템을 가동하던 홍콩 시절의 이야기 구조와는 결별한 것이다.
가혹할 만큼 장난스럽게 두 사람의 신분을 맞바꿔 놓은 오우삼은 살아 남기 위해 얄궂은 운명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 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과 선악의 경계를 섬뜩하게 물었다.
헐리우드에서 만든 네 번 째 영화 <미션 임파서블 2>로 오우삼은 이제 헐리우드에서 완전한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미션 임파서블 2>는 홍콩 영화에서 그가 흔들림 없이 보여준 매력 혹은 덕목을 더 이상 지킬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눈이 핑핑 돌아가는 이 '톰 크루즈 판 007'을 만들면서 오우삼은 과거의 상투적인 스타일을 간간이 사용했다. 문제는 그것이 관객들에게 비장함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비현실적인 낭만주의와 과장된 스타일 거기서 나오는 스산함이 없다면 오우삼 영화를 굳이 봐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미션 임파서블 2>는 10년 전 오우삼이 홍콩에서 겪었던 고난의 길에 다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예고하는지도 모른다. 당분간 오우삼은 재능 있는 액션 감독으로 건재할 테지만 말이다.
<김태수(tskim@film2.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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