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존]저예산 영화의 패기가 만든 진짜 액션 '죽거나 나쁘거나

입력 2000년 6월 20일 11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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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 류의 현란한 액션이 더러 나오지만 머리 끄댕이를 잡아 당기고 두 손으로 눈을 찌르는 개싸움이 많다. 그래서 그 싸움은 진짜 아파 보이고 더 처절하다.

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하드보일드 액션 릴레이'를 표방한다. 따로 찍은 단편영화 4편을 영리하게 엮어 장편으로 뽑아내면서 릴레이란 말을 붙인 것이고 액션을 만들되 허황되지 않은 현실을 잔혹하게 그렸으니 하드 보일드란 수식어를 빌려 쓴 것이다.

<닥터 K> <삼인조> <여고괴담>의 스태프로 일하면서 1996년 첫 단편 <변질헤드>로 이름을 알린 류승완 감독은 이 영화의 1부 '패싸움'을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 자투리 필름으로 만들어 98년 부산단편영화제에서 우수작품상을 받았고 3부 '현대인'으로 99년 한국독립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과 관객상을 받았다.

개싸움 액션과 다큐멘터리 풍의 인터뷰가 섞인 첫 번째 에피소드 '패싸움'은 욕을 입에 달고 다니는, 양아치 같은 공고생과 예고생이 사소한 시비 끝에 당구장에서 주먹질을 하다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다. 싸움을 시작한 석환(류승완)을 뜯어 말리던 성빈(박성빈)이 맥주병으로 머리를 내리친 예고생은 당구대에 머리를 부딪혀 죽는다.

호러 분위기로 양념을 친 두 번째 에피소드 '악몽'은 살인죄로 7년을 복역한 성빈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그린다. 아버지(이장호)의 힐난과 형사가 된 친구 석환의 외면, 찐드기처럼 구는 형사의 감시에 괴로운 성빈은 자신이 죽인 예고생이 피를 흘리면서 나타나는 악몽에 시달린다. 우연히 동네 깡패 태훈을 도운 성빈은 직장까지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형사를 죽이고 아예 깡패로 나선다.

세 번째 에피소드 '현대인'은 성빈의 보스 태훈(배중식)과 그를 잡기 위해 잠복근무하는 석환의 이야기다. 팔팔하던 두 사람이 기진맥진할 때까지 싸우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왜 그들이 각자 깡패와 형사가 됐고 그들의 애환이 뭔지를 말하는 인터뷰 장면을 교차편집한다.

가볍고도 살벌한 갱스터 분위기의 네 번째 에피소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문제아인 동생 상환(류승범)을 부하로 삼은 성빈과 동생을 아끼는 석환의 끔찍한 대결과 함께 상환이 폭력 조직의 칼받이가 돼 죽는 이야기다.

영화는 오우삼 영화에서 비현실적인 낭만주의를 훌훌 털어버렸다. 오우삼의 영웅적인 캐릭터가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류승완 감독의 캐릭터들은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싸울 뿐이다.

하찮은 일로 패싸움을 하다 전과자가 되는 바람에 직장생활을 할 수 없게 된 성빈은 물론이고 군인과 경찰이 대접 받는 사회에서 무사안일주의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석환, 돈 없고 빽 없고 머리는 나쁜데 주먹은 좀 쓸 줄 알아서 건달이 된 태훈, 공부 체질은 아니고 오락실에서 돈 뜯을 싸움 실력은 있는 석환의 동생 상환.

이들은 모두 먹고 살기 위해, 사는 게 마음대로 안돼 싸움을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폭력에 대한 책임이 그들이 발 붙이고 사는 사회에도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싸움의 목적뿐 아니라 싸움의 방식도 오우삼 것과는 다르다. 멋들어진 의상을 입고 공중낙법을 하며 쌍권총을 쏴대는 스펙터클한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한 오우삼과 달리 총제작비를 6천5백만원 밖에 쓸 수 없었던 류 감독은 손과 발로 싸우는 소박한 액션을 연출한다.

종종 합을 많이 짜야 하는 성룡 류의 현란한 액션이 더러 나오지만 머리 끄댕이를 잡아 당기고 두 손으로 눈을 찌르는 개싸움이 많다. 그래서 그 싸움은 진짜 아파 보이고 더 처절하다. 특히 공사판에서 집단 패싸움을 벌이며 칼부림을 하는 4부의 액션은 수공업 방식의 승리라고 할만하다. 다만 이야기를 경제적으로 긴장시키기 위해 교차편집을 한 것은 오우삼의 그것을 본 뜬 것인데 빠른 줌업과 탈색된 화면 같은 것이 끼어 들어 변화를 꾀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까지 직접한 감독은 섬뜩한 액션 못지 않게 유머러스한 대사로 영화에 윤기를 낸다. 사회에 대한 비판과 인간에 대한 냉소를 담고 있는 그 대사는 송능한의 그것처럼 훈계조가 아니어서 좋다. 실제 상황에서 나옴 직한 그 대사는 묘한 상황과 어우러져 폭소를 자아낸다.

감독과의 개인적인 인연으로 출연해 준 연기자들은 평상시 쓰는 말을 하듯 자연스러운 액센트로 살벌한 욕설들을 뱉어내는데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큼 속이 시원하다. 에피소드를 잇는 박음질에 솔기가 보이고 신파조의 이야기와 과장된 액션이 다소 거슬리긴 하지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저예산 영화의 패기와 서늘한 하드보일드 기질이 그것을 다 덮어버렸다.

<김태수(tskim@film2.co.kr)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