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럴까. 감독 카트린 브레이야는 명시적으로 가타부타 말하지 않는다. 매저키즘의 세계에 기꺼이 몸을 의탁한 마리의 도발을 보는 것은 관음증의 즐거움과 거리가 멀며 때로는 고통을 준다. 자학적인 성의 향연에 몸을 던지면서도 마리의 의식은 또렷이 깨어 있다. 이 영화의 대사는 현학적일 만큼 지적이고 섬세하다. 도무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여성의 육체적 갈망에 관한 고백서인 것이다.
잘 생긴 모델 폴과 동거하는 여교사 마리는 폴이 자아도취에 빠져 그녀와의 섹스를 거부하자 다른 남자 상대를 찾아 나선다. 정력의 화신 같은, 대단한 성기를 지닌 파올로와 만나 성교한 마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 두 번째 상대인 학교 교장 로베르는 수많은 여자를 정복했다고 으스대는 역겨운 중년 남자지만 그가 제시하는 변태 성교의 세계에 마리는 빠져든다. 마리가 거리의 계단에서 어떤 잡놈에게 무참하게 강간당하는 장면에서 '로망스'라는 제목의 아이러니는 꼭대기로 치닫는다.
<로망스>가 획기적인 이유는 모든 것이 여성의 관점으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인지, 꿈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환타지 형식으로 상처 입은 여성 자아의 성적 모험을 최면을 걸 듯이 펼쳐놓는 <로망스>는 별다른 기교 없이 하얀 원피스를 입었던 마리가 붉은 원피스를 입고 정욕의 화신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꿈꾸는 것처럼 묘사한다.
상처 입은 성적 자아를 치유하는 환상의 모험이라는 설정은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과 비슷하지만 <로망스>는 더 한 것을 해낸다. 이것은 환상이기도 하지만 금기를 깨는 도발이기도 하다. 매저키즘에 빠져드는 마리의 성적 여정은 완고하게 남성 중심으로 결집된 성욕의 고정관념에 대한 반항이다.
폴을 침대에서 다시 차지하기 위해 마리는 다른 남자를 찾아 나선 것이지만 금기시된 영역에 몸을 맡기고 자신의 욕망을 또렷이 응시하면서 성적 권력과 쾌락은 남자에게 바라기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욕망을 자각할 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임을 알아낸다.
감독 브레이야는 섹스가 육체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정신적인 것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영화의 한 장면에 흐르는 내레이션처럼 "남자의 성기를 몸으로 받을 때 자신은 사라지는 것"이지만 그걸 누리기 위해 치르는 수고에는 정신의 자각이 필요하다.
브레이야의 시각 스타일은 주제만큼 뛰어나진 않지만 별다른 치장 없는 그 기교는 배우들의 대담한 연기 때문에 더욱 충격을 준다. 촉촉이 젖어 있는 성기를 클로즈업하고 그 성기에서 아이가 출산하는 광경을 세상의 탄생처럼 묘사하는 배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브레이야는 하드코어 포르노의 수준에 육박하는 묘사로 감춰진 성의 내면 세계를 간접적인 환상의 틀을 빌어 다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폴의 장례식을 치르는 마리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감돈다. 마치 루이 브뉘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것은 현실인지 꿈인지 애매한 경계를 내보이면서 마리의 이 모든 환상이 당장 현실에서 충족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기묘한 에너지다. 창조하는 것도 파괴하는 것도 아닌, 단지 스쳐 지나가고 때로는 교차하는 에너지일 뿐이다. <로망스>는 성 묘사의 혁신을 진정으로 이뤄낸 영화로 남을 것이다.
<김영진(hawks@film2.co.kr)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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