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메일] '언피쉬'-깜찍한 우화라구요?

  • 입력 2000년 4월 26일 11시 18분


영화 '언피쉬'의 한 장면
영화 '언피쉬'의 한 장면
4월 29일 개봉될 독일영화 '언피쉬'(감독 로베르토 돈헬름)는 어느날 박제된 고래가 산골 마을에 실려오고, 고래 뱃속에서 사는 여자와 섹스를 하며 절정의 순간에 소원을 빌면 그대로 이뤄진다는 설정의 영화입니다. '파니 핑크'를 봤던 사람이라면 마리아 슈레더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가 반가울지도 모르겠네요.

엉뚱한 상상에서 출발한 '언피쉬'는 이야기가 헐거워서 몰입하긴 어렵지만 상징이 풍부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깜찍하고 귀여운 우화라고들 하던데 전 좀 기괴한 느낌을 받았어요.

고래 뱃속의 여자 무어는 우연히 개가 되어버린 여자 마리아를 사람으로 돌려놓기 위해 동네 남자들을 찾아가 자신과 섹스를 하며 마리아가 사람이 되게 빌어달라고 부탁하지만,남자들은 그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시장은 테니스 코트를, 또 누구는 좋은 집을,누구는 돈가방을 달라고 빌고, 심지어 성당의 신부마저 하늘을 날게 해달라고 빌었던 모양인지 공중을 둥둥 떠 다니게 됩니다. 뭐, 탐욕스러운 사람들이라고 비난할 필요도 없어요. 소원이 무엇이든 다 이뤄진다는데, 그리고 한 번 뿐이라는데,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것을 바라게 되는 건 평범한 사람들의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욕망 그 자체가 죄는 아니니까요.

뜻하지 않게 마을의 공창(公娼)이 되어버린 무어는 이제 옷 벗는 수고를 덜기 위해선지 아예 속옷바람으로 고래 뱃속에서 살면서 그 신비한 능력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아내들이 무어와 성관계를 갖고 돌아온 남편들을 격려하고, 주민들이 고래를 치장하는 장면은 우습다 못해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진부하지만 옳은 교훈대로 턱없이 많은 재물을 갖게 된 사람들은 불행해지는 법. 욕망의 달콤함을 맛본 동네 주민들은 서로 더 갖기 위해 싸우고 평화롭던 시골 마을에는 불화가 끊이지 않게 됩니다. 위기상황에 처한 군중이 늘 희생양을 요구하듯, 동네 사람들은 이 모든 불행의 근원이 저 고래와 무어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반목과 다툼을 해소하기 위해 주민들이 선택한 방법은 고래를 불태워 호수에 갖다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박제된 고래는 드디어 물로 돌아가고, 고래 뱃속에서 함께 수장(水葬)당한 무어의 얼굴은 마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처럼 성스럽게 빛납니다.

만일 '언피쉬-그 후'를 만든다면 마을 사람들이 고래를 불태운 날을 기념해 제례같은 걸 치르는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요? '고래소동'은 그 마을에 구전되는 신화가 될 수도 있고

또 혹시 압니까. '고래교(敎)'같은 사이비종교가 그 마을에 생길지도 모르죠.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하던 중세에도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근거 없는 소문 이 퍼져 박해당했지만, 이들이 희생 제물이 된 뒤에는 되레 흑사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희생양을 공격하는 만장일치적 폭력은 위기에서 공동체를 구해주고 질서와 평화를 회복하는 정화의 기능을 갖습니다. '사악한 존재'로 단죄당한 희생양은 이제 행운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신격화되거나 두려운 초월적 존재가 됩니다. 종교나 신화같은 게 대체로 이런 메커니즘을 통해 생겨난다는 것이 프랑스 문화이론가 르네 지라르의 주장이기도 하죠.

4월초 개봉했다가 안타깝게도 1주일만에 간판을 내린 스파이크 리 감독의 '썸머 오브 샘'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본 영화중 가장 재미있었던 영화중의 하나인 '썸머 오브 샘'은 들끓는 욕망과 불안에 시달리는 집단에서 무기력하고 소외된 사람이 희생양으로 선택되는 폭력의 매커니즘을 빼어나게 그리고 있습니다.

'썸머 오브 샘'에서 연쇄살인사건으로 공황상태에 빠진 마을 주민들이 외국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살인마 샘을 잡자"며 성대한 파티를 벌이는 장면은 중세의 마녀사냥처럼 광기들린 종교의식을 연상케 합니다. 마을 청년들은 모든 폭력을 한꺼번에 전가할 수 있고,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을 능력이 없는 희생양으로 힘없는 펑크족 리치를 선택합니다. 리치를 살인범으로 지목한 건 "아무튼 정상적이지 않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입니다.

도대체 소수를 차별하지 않는 사회란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요? 평온한 상황에서야 남이 나와 다른 게 별 문제가 안되겠지만, 사회가 위기에 처해 들끓을 때에는 절대 다수의 평균치에서 벗어난 사람과 집단은 군중의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놓고 보아도 내 불행과 불안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으려는 태도는 아주 뿌리가 깊은 것같기도 합니다. 일상적으로는 비일비재한 그런 일이 카메라에 비춰졌을 때, (나도 그 중의 한 명일 수 있는) 평범한 이웃들의 얼굴은 얼마나 흉하게 일그러져 보이는지…. 제게 '언피쉬'가 기괴해 보였던 까닭은 이 때문입니다.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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