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구식 휴먼 드라마로 그칠 뻔 했던 이 영화가 재미있어지는 대목은 한 마을을 오염시킨 거대 기업의 횡포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이 아줌마 영웅이 전혀 '모범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줄리아가 연기한 에린은 보기 민망한 옷차림에, 입이 걸고, 심지어 뻔뻔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옳다고 믿는 일에 물불 가리지 않고 헌신하는 그의 화끈한 매력에는 굴복할 수 밖에 없지요. 더군다나 실화라는데, 영화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잠깐 나오는 진짜 에린도 줄리아 못지 않은 미인이던데, 와우! 저렇게 상큼한 행동주의자가 주변에 있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주민들 "영화가 사실 왜곡"▼
그러나 최근 시사주간지 '타임'을 비롯한 미국 언론들이 전하는 에린 브로코비치의 실제 이야기를 보면 좀 황당해집니다. 에린의 싸움은 그의 자발적인 용기가 아니라 주민의 제보로 시작됐고, 변호사들의 소송 진행과정은 음모와 추문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주민들은 영화가 사실을 왜곡했다고 분노를 터뜨리구요. 그렇다면 에린의 투지에 감동하는 영화 관객들은 사기극에 속고 있는 건가요?
'에린 브로코비치'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극영화임을 감안하면, 사실과 다르다는 것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진실과 가까운가는 실화를 영화로 옮길 때 늘 뒤따르는 위험이고, 어차피 영화가 담을 수 있는 건 반쪽짜리 진실 뿐일런지도 몰라요. 또 이 영화의 왜곡에 반발하는 주민들도, 거대 기업에 맞서 싸워 미국 중재재판 사상 최고액인 3억3300만 달러의 배상금을 받아낸 결말의 '승리'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니 영화가 사실에 기름칠을 좀 했다고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오히려 기분을 씁쓸하게 만든 건 '승리'이후의 소식입니다.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 배분을 둘러싼 잡음은 주민들을 분열시켰고, 에린과 변호사와의 친분에 따라 분배가 결정됐다고 믿은 주민들은 이에 항의하려 했지만 에린은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환멸을 느낀 주민들이 소송을 준비하는 동안 에린은 10만 달러를 받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리우드 영화사에 팔고 TV 쇼에 나가 영웅담을 과시했다는 군요. 영화가 제게 안겨준 산뜻한 감동을 앗아간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이 아니라 이 개운치 않은 후기(後記)였습니다.
▼배상금 배분 싸고 잡음▼
사실, 감동적인 성취의 후기가 아름답지 않은 경우는 현실에서도 종종 있는 일입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가 응집되어 터져나오는 혁명적 순간은 절반의 진실만을 담은 영화처럼 찬란하고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후손들에게'라는 시에서 썼듯, "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만듭니다. 그늘진 고난 속에서 형성된 강력한 연대는 햇볕이 내려쪼이면 시들기 십상이지요.
하지만 너절한 후기가 일생에 끼어들 틈이 없을만큼 완벽한 영웅이 아닌 다음에야 대개는 빛나는 순간과 스스로도 외면하고 싶은 추악한 전락을 반복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끝이 누추함을 뻔히 알면서도 '에린 브로코비치'같은 영화가 전해주는 조그만 감동이나마 위안으로 삼고 싶은 건, 누구도 완전하지 않음을 이미 자기자신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김희경<동아일보 문화부 기자>susanna@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