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럴뻔 했던 이 영화가 재미있어지는 대목은 한 마을을 오염시킨 거대 기업의 횡포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이 아줌마 영웅이 전혀 ‘모범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줄리아가 연기한 에린은 보기 민망한 옷차림에, 입이 걸고, 심지어 뻔뻔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옳다고 믿는 일에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그의 화끈한 매력에는 굴복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실화라는데, 영화에 식당 종업원으로 잠깐 나오는 진짜 에린도 미인이던데, 와우! 저렇게 상큼한 행동주의자가 주변에 있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그러나 최근 시사주간지 ‘타임’을 비롯한 미국 언론들이 전하는 에린 브로코비치의 실제 이야기를 보면 좀 뜨악해진다. 주민들은 영화가 사실을 왜곡했다며 에린과 변호사에 대해 분노를 터뜨린다. 그렇다면 에린의 투지에 감동하는 관객들은 사기극에 속고 있는 건가?
‘에린 브로코비치’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극영화임을 감안하면, 사실과 다르다는 것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영화가 담을 수 있는 건 반쪽짜리 진실에 불과하니까. 또 이 영화의 왜곡에 반발하는 주민들도, 거대 기업에 맞서 싸워 미국 중재재판 사상 최고액인 3억3300만 달러의 배상금을 받아낸 ‘승리’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니 영화가 사실에 기름칠을 좀 했다고 그게 뭐 대수인가.
오히려 씁쓸한 건 ‘승리’이후의 소식이다.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 배분을 둘러싼 잡음은 주민들을 분열시켰고, 에린과 변호사와의 친분에 따라 분배가 결정됐다고 믿은 주민들은 이에 항의하려 했지만 에린은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환멸을 느낀 주민들이 소송을 준비하는 동안 에린은 10만 달러를 받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리우드 영화사에 팔고 TV 쇼에 나가 영웅담을 과시했다. 이 개운치 않은 후기(後記)가, 영화가 안겨준 산뜻한 감동을 흐려놓는다.
사실, 감동적인 성취의 후기가 아름답지 않은 경우는 현실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다. 불의에 대한 분노가 응집되어 터져나오는 혁명적 순간은 절반의 진실만을 담은 영화처럼 찬란하다. 그러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말처럼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 그늘진 고난 속에서 형성된 강력한 연대는 햇볕이 내려쪼이면 시들기 십상이다.
하지만 너절한 후기가 일생에 끼어들 틈이 없는 완벽한 영웅이 아닌 다음에야, 대개는 빛나는 순간과 스스로도 외면하고 싶은 추악한 전락을 반복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 끝이 누추함을 뻔히 알면서도 ‘에린 브로코비치’ 같은 영화가 주는 조그만 감동이나마 위안으로 삼고 싶은 건, 누구도 완전하지 않음을 이미 자기자신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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