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카’에서 가장 기묘하게 느껴진 대목은 여섯 손가락을 가진 피아니스트의 연주 장면이었다. 훌륭한 피아니스트를 꿈꾼다면 각고의 노력 이전에 손가락을 하나 더 가질 수 있는 유전자를 선택하면 된다. 이 영화에, 불투명하지만 가슴 설레는 가능성으로 가득찬 미래란 없다.
가능성은 불확실성과 동전의 양면같은 것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와 호기심은 점성술을 발달시켰지만 점성술은 숙명론적인 자세 때문에 근대 과학으로부터 비판받아왔다.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과학은 발전을 거듭한 끝에 비밀에 쌓여있던 개체의 미래에서 불확실성의 장막을 걷어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가타카’를 보면 이 발전의 과정이 좀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유전자 정보를 통해 미래를 미리 알고 시작하는 인생은 외양만 달라졌을 뿐 과학 이전의 단계와 똑같이 숙명적이기 때문이다.
세네카의 말마따나 “미래를 눈치채는 마음은 비참하다.” 이는 상영중인 판타지 멜로영화 ‘동감’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선 통신을 통해 2000년의 남자와 연결된 1979년의 여자는 박정희 대통령도, 김일성도 죽는다는 미래의 일들 뿐 아니라 마음 설레던 첫사랑이 실패한다는 자신의 미래도 알게 된다. 앞날을 미리 알고 실패가 예견된 꿈을 접는 고통도 실패 못지않게 잔인하다.
누구나 미래를 알고 싶어하지만, 영화속에서처럼 미래를 선험하며 살게 된다면 그 현재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연한 출생으로 인생에서 부여받는 기회와 미래의 지도는 제각각 달라진다. 그러나 미래 그 자체보다 더 풍요한 건 미래 속에 잉태되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일 것이다.
‘가타카’에서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는 주인공은 연인에게 “나는 태어날 때 30년밖에 못산댔지만 벌써 지났다. 모든 게 가능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가타카’는 게놈 해독이 가져올지도 모를 미래에 대한 과장된 묵시록이지만 동시에 결점투성이의 불완전한 존재일지라도 가능성에 대한 믿음, 미래에 대한 꿈을 잃지 않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한 역설(逆說)을 들려준다.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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