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사람들이 "요즘 어떤 영화가 좋냐?"고 물어볼 때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저 사람의 취향과 좋아하는 스타일을 모르는데 도대체 어떤 영화를 좋다고 말해줘야 하나….
할 수 없이 '이전에 재미있게 본 영화가 뭐였나' '누구랑 갈거냐'를 꼬치꼬치 캐묻게 되는데, 거의 심문에 가까운 내 반응에 질려 손사레를 치며 돌아간 사람도 더러 있다.
도대체 '좋은 영화'라는 건 뭘까. 동아일보에 매주 게재하는 '주말개봉영화 시사실'에서 영화 한 편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점이 A+에서 D-까지 전부 다른 걸 보면 '좋은 영화'뿐 아니라 '잘 만든 영화'에 대한 기준조차 사실은 상당히 주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떠받드는 걸작이라 해도 도저히 끝까지 참고 보기 힘든 영화가 있는가 하면, 쓰레기 같다는 비난을 들어도 내게는 보석같은 영화가 있다. 남들이 뭐라든 내게 말을 걸고 내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가 '좋은 영화'이고 '잘 만든 영화' 아닐까.
영화가 말을 거는 여러 방식중 하나는 보는 이를 울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영화를 보며 울게 되는가도 그야말로 '백인백색(百人百色)'이다. 나는 눈물이 많은 편이지만 '편지'나 '약속'같은 '눈물의 멜로' 영화를 보며 울어본 기억은 없다.
대부분의 여성 관객들이 울던 '타이타닉'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난 전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반면 '중앙역'과 '매그놀리아'를 보면서는 줄줄 흐르는 눈물을 제어할 수 없었다.
최근 들어 가장 심하게 나를 울린 영화는 '박하사탕'이었다. 언젠가는 술기운에 누군가를 붙잡고 고장난 라디오처럼 "박하사탕이 너무 슬퍼!"만 반복하며 30분 가까이 엉엉 울었던, 낯뜨거운 경험도 있다.
8월11일 비디오로 출시될 '사이더 하우스'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영화다. 6월에 이 영화가 개봉됐을 때 고아원에서 자란 청년이 세상 속으로 뛰어든다는 설정과 라쎄 할스트롬 감독의 '개같은 내 인생' 같은 전작들 때문인지, '사이더 하우스'를 성장영화로 바라보는 글들이 많았는데 나는 '글쎄, 그게 아닌데…'하는 심정이 되어 무척 안타까웠다.
'사이더 하우스'는 마음과 육체가 시키는 대로 달려가다 발을 헛디딘 인물들의 어리석은 인생을 묘사하면서도 영화속 인물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보는 이의 마음을 묘하게 위로해주는 영화다.
사실 오점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예컨대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은 실수투성이인 삶과 추악한 세상을 소름 끼치도록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사이더 하우스'는 똑같은 인생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나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함의가 제목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제목은 '사이더 하우스 룰스(Cider House Rules)'인데 번역하면 '사과주스 농장의 규칙' 쯤 된다.
고아원에서 자란 청년 호머는 고아원을 운영하는 의사 라치에게 낙태수술을 받으러 온 캔디와 윌리 커플을 따라 고아원을 떠나 사과주스 농장에서 일하게 된다.
제목은 영화에서 '술마시고 기계를 만지지 말 것' '침대위에서 담배피지 마라' 등 농장 일꾼들이 지켜야 할 수칙을 가리킨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일꾼들은 호머가 벽에 붙은 이 수칙을 읽어주자 "바보같은 규칙"이라며 비웃는다. 너무 뻔해서 바보같은 것이다.
이 뻔한 수칙처럼 세상에는 누구나 다 아는,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있다. 남의 애인을 넘보면 안되고, 거짓말을 하면 안되고, 더군다나 아버지가 딸을 여자로 바라보는 건 천벌을 받아 마땅한 짓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호머는 전쟁터에 나간 윌리의 애인 캔디와 사랑에 빠지고, 엄격해 보이던 일꾼 로즈는 딸을 임신시키며, 라치 박사는 호머를 위해 의사 자격증을 위조한다. '규칙'에 비추어 보자면 이들은 모두 단죄받아 마땅한 일들을 저질렀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들의 추악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단죄하지도, 이들의 편을 들지도 않는다.
딸을 임신시킨 로즈는 "세상에 완벽한 규칙이란 없다. 잘못된 걸 바로잡는 게 더 중요해"라고 말한다. 그가 규칙을 바로잡는 방식으로 선택한 건 죽음이었다. 호머가 선택한 방식은 전쟁터에서 불구가 되어 돌아온 윌리에게 로즈를 떠나 보내고 고아원으로 돌아온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 희망이란 없다. 고아원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던 호머의 마지막 대사, "과거에는 희망에 들떴으나 부질없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모두 잊었다"에는 오히려 희망이라는 게 과연 있느냐고 묻는 듯한 스산한 기운까지 묻어난다.
사람은 누구나 무한한 다방향성을 가진 다양성의 덩어리여서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이 때로는 희망이라는, 꿈이라는 형태로 불쑥 불쑥 드러나곤 한다. 누구나 최선을 꿈꾸고 행복을 바라지만, 대개의 사람들에게 현실의 선택은 차선(次善)일 수 밖에 없고 다만 불행하지 않은 상태를 행복이라고 믿고 사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일본 비평가 아사다 아키라가 "사람(人)이 주인(主)이라고 쓰고 주거 주(住)라고 읽듯이 주체라는 것은 정주하는 인간"이라고 썼듯, 대개는 떠도는 자의 설렘을 포기하고 적당한 자리에 안주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었던 꿈, 이루어지지 못한 희망은 깊은 환부로 남는다.
나는 '사이더 하우스'를 보며 희망에 들뜬 과거와 소소한 '규칙 위반'들을 떠올리고, 부질없음을 알아가는 현재가 슬퍼졌고, 언젠가는 희망은 잊되 그것이 안겨준 상처만을 기억하게 될 미래가 생각났다.
달뜬 욕망을 누르지 못해, 해서는 안될 짓까지 저질렀지만 자신의 잘못과 상실의 고통까지를 모두 받아들이고 스산한 세상을 묵묵히 감내하는 어른의 태도를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한 호머의 표정, "괜찮아.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하고 말하는 것만 같은 그의 마지막 얼굴을 보며, 그만 울어버렸다.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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