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아르 영화를 좋아한다. “사회적 갈등에 대한 미학적 해답”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1970∼80년대 불운한 성장기를 거친 우리 세대는 너나 할 것 없이 누아르에 심취해 청년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한국 누아르의 고전 ‘용팔이’ 시리즈부터 ‘스카페이스’ ‘대부’, 그리고 ‘영웅본색’을 비롯한 홍콩 누아르까지…. 이 어둡고 외로운 영화들에 빠져있던 두 시간 만큼은 쾨쾨한 냄새가 진동하는 변두리의 삼류 극장조차 더할 수 없이 아늑하고 근사했다.
그 때 우리는 누아르의 어떤 점에 그렇게 매혹됐던 것일까? 거기엔 우선 남자들이 있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표현처럼 “비열한 거리에서 결코 때묻지 않고 두려움 없는 사내”였던 남자들이. 그들은 무력한 우리를 대신해서 꿈을 꾸고, 속물적인 우리를 대신해 좌절한다. 눈먼 연인의 수술비를 마련하려는 ‘영웅본색’의 아젱(주윤발)이 마지막 순간에도 연인과 손을 잡지 못했듯이, 작은 횟집이라도 하나 차려 좋은 친구들과 술이나 마시며 늙어가려던 ‘킬리만자로의’의 번개(안성기)가 끝없는 설원 위에서 쓸쓸하게 삶을 마감하듯이. 누아르 영웅들의 꿈은 모두 소박했지만, 난마처럼 얽힌 세상의 모순은 그들에게 가혹한 대가를 요구했다.
불가능이란 없어 보이는 디지털 시대에도, 인간인 이상 우리는 꿈을 꾸고, 그 꿈에는 좌절도 따를 것이다. 내가 제작자로서 영화 ‘킬리만자로’를 만들려고 했던 이유는 어쩌면, 점점 사라져 가는 ‘멋진 남자들’을 다시 스크린에 불러내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만들면서 내내 그들을 생각했다. 오늘도 어디선가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을, 꿈과 상처를 가진 그들을….
차승재(싸이더스우노필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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