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의 세상스크린]영어, 못해도 당당합시다

  • 입력 2000년 11월 20일 18시 54분


1991년부터 2년간 저는 미국 뉴욕대 대학원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중고교 시절 영어를 비교적 잘하는 편이었고 배우 생활 도중에도 짬짬이 학원을 다니며 제 딴에는 영어에 꽤 신경을 썼지만 미국에서 공부하기엔 역시 부족했습니다. 학과공부는 노력하면 어느 정도 해 낼 수 있었지만 미국인들이 편안하게 쓰는 일상적 회화가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웠습니다.

◇ Do you have the time?

유학 초기 프랑스계 미국인 여학생인 에들린과 같이 수업한 적이 있습니다. 참 예쁘고 귀엽게 생겨서 저는 그를 만날 때마다 함박웃음에 온갖 친절한 표정을 다 지으며 호감을 사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수업이 끝난 뒤 에들린이 생글생글 웃으며 제게 한 마디 건넸습니다.

에들린:Jay!(제 미국이름이었습니다. 제 이름 ‘Joonghoon’을 ‘융홍’또는 ‘정헝’으로 잘못 발음하는 미국 사람이 많아 그냥 첫 알파벳 ‘J’로 부르게 했습니다.)

중훈:(아주 반가운 얼굴로) Yes.

에들린:Do you have the time?

제게 시간이 있냐고 물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중훈:Yes! Yes I do! Of course.

에들린:(고개를 갸우뚱거리며) Ha―a?

‘Do you have time?’은 ‘시간있습니까?’이지만 ‘Do you have the time?’은 ‘몇시입니까?’라는 의미였는데 저는 그만 혼자 좋아하고 말았던 겁니다. 나중에 상황을 알아차리고 깔깔 웃는 에들린 앞에서 저는 얼굴이 벌개졌습니다.

1993년 SBS TV ‘머나먼 쏭바강’을 촬영하느라 베트남에서 거의 1년을 보냈습니다. 베트남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지만 얼굴이 벌개지지 않았습니다. 베트남인들이 제 이름 박중훈의 발음을 잘못해 비음을 섞어가며 “빵쭝웅”이라고 불러도 제 이름을 ‘쭝’이라고 바꾸지 않았습니다.

물론 베트남이라는 나라를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미국이 금세기 최강대국이자 정치경제의 일번지이기에 영어를 잘 알아두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좁아진 지구촌 시대에 좀 더 편리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부모들이 자녀가 우리말과 민족 정체성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보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불편할뿐 유-무식 잣대 안돼

하지만 똑같은 외국어인데도 베트남어나 스페인어를 못하면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영어를 못하면 우리는 몹시도 부끄러워 합니다. 어느 일본인이 지적했듯 우리 말, 우리 생각, 우리 것이 무조건 최고이고 세계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지나친 자부심, 독선적 착각도 그동안 우리의 발전을 막아온 큰 이유였겠지만 한편 강대국의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혹 열등감을 느끼고 당당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영어는 편리와 불편의 문제이지 무식과 유식의 잣대가 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베트남 촬영 이후 저는 미국 사람을 만날 때면 ‘Jay’라는 이름 대신 ‘JoongHoon’이라는 원래 제 이름을 이야기하고 다닙니다.

joonghoon@seromesof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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