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부터 성황리에 열리고 있는 '영국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도 입증됐듯이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영국이 지닌 저력은 막강하다. 많은 작가들을 배출했고, 볼렉스 스튜디오, 아드만 스튜디오, 탄뎀 스튜디오 등 독특한 개성과 높은 제작력을 가진 제작사들이 버티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출시된 두 편의 작품에서는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애니메이션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톰 섬의 비밀모험>과 <샌드맨>은 우리가 자주 보던 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엄지 톰의 비밀모험>은 클레이 애니메이션과 오브제, 픽실레이션 등 다양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기법들이 사용되고 있고, <샌드맨>은 전통적인 유럽의 인형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두 작품은 소재 면에서 모두 서구의 전설이나 동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엄지 톰'은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자주 접했던 이야기중의 하나이고, '샌드맨' 역시 서구에서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재울 때 즐겨 인용하는 전설이다.
하지만 두 작품은 원작이 지닌 밝고 환상적인 세계를 섬뜩하고 끔찍한 백일몽의 세계로 비틀어 해석하고 있다. 동화의 '엽기 버전'이라고 할까?
우선 <톰 섬의 비밀모험>을 보자. 흔히 '엄지 톰'으로 불리는 이야기는 누구나 잘 알고 있듯 엄지 손가락만한 크기로 태어나 '엄지 톰'이라 이름이 붙은 아이가 세상에 나와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활용해 펼치는 무용담을 그린 영국 동화이다.
그러나 <톰 섬의 비밀모험>의 극본, 디자인, 연출, 편집 등 1인4역을 한 데이브 보스윅은 작품의 배경을 시대가 불분명한 어둡고 음침한 마을로 바꾸었다. 화면에는 하수구와 바닥에 뒹구는 각종 쓰레기와 파리, 모기떼들이 시종일관 등장한다.
주인공 '톰 섬'의 모습도 귀엽고 당찬 동화속 이미지가 아니라, 민머리에 툭 튀어나온 눈을 가진 그로데스크한 모습이다. 픽실레이션(사진과 같은 정지된 영상을 이용한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처리한 '톰 섬'의 부모를 비롯해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땀이 번들번들한 얼굴에 피곤하고 옹색한 몰골을 하고 있다.
극중 '톰 섬'과 같은 소인들이 사는 마을은 쓰레기장 안에 있다. 쓰레기에서 악취와 폐수로 인해 가스 마스크를 쓰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정상인은 무심결에 자신들의 집을 부수고 동료들을 밟아 죽이는 공포의 존재이다.
어느 한 구석, 동화적인 안온하고 푸근한 분위기가 없는 이 작품의 매력은 이런 기본 틀 속에서 역설적으로 가족의 사랑과 생명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모만 봐서는 자식에 대한 애정과는 담을 쌓은 것 같은 '톰 섬'의 부모들이 자식에게 보여주는 무조건적인 애정과 헌신은 '위악적인' 영상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또한 '톰 섬'이 마을을 장악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인간들에게 붙잡혀 끌려간 실험실에서 만난 괴물들은 동화와 전설 속에 등장하던 '존재'들. 하늘을 날며 불을 내뿜던 익룡과 공룡 등이 실험실의 섬뜻한 기계에 몸이 묶여 난자당하고 있는 것이다. 기계화되고 자동화된 사회, 쓰레기 더미의 세상 속에서 '상상의 괴물'들이 처참한 몰골로 '해체'되는 모습은 꿈과 상상이 사라진 차가운 금속질의 현실을 은유하고 있다.
이런 탈출구 없는 답답한 세계에서 '톰 섬'이 택한 선택은 꿈과 상상이 있는 세계로 가는 것. 그곳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 동화처럼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동화의 틀을 빌려 현실과 잘 구별이 안되는 '악몽'을 그리고 있는 보스윅의 작품 세계는 같은 영국의 선배 작가인 퀘이 브러더즈의 세계관과 일맥상통함을 느낄 수 있다.
<톰 섬의 비밀모험>이 동화속 세계를 현대적인 분위기로 비틀었다면, <샌드맨>은 중세 유럽의 괴담에서 느낄 수 있는 으시시한 분위기를 환상적으로 펼치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이자 제목인 '샌드맨'은 직역하면 '모래남자'인데, 원래 서구의 전설에 등장하는 괴물의 하나이다. 밤에 잠을 들지 않는 아이들의 눈에 모래를 넣어 잠을 재운다는 괴물이 샌드맨이다. 나이트메어가 '몽마(夢魔)'라고 불리는 것과 비교해 샌드맨은 '수마(睡魔)'라고 불린다. 전설에 따르면 아이들이 밤에 졸릴 때 눈을 비비게 되는 이유가 샌드맨이 잠오는 모래를 눈에 뿌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의 '삼신할머니'나 '저승사자'처럼 워낙 널리 알려진 '괴물'-사실 괴물이라 부르기도 곤란한 무해한 존재-이라 샌드맨이 등장하거나 그 전설을 응용한 작품들도 많다.
영화에는 <슬립터거>와 <샌드맨>이 있고, 음악에서도 올드 팝 <미스터 샌드맨>, 메탈리카의 <엔터 샌드맨>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사뭇 낭만적이고 온화한 존재인 '샌드맨'이 폴 베리의 10분 짜리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로데스크하고 공포스런 존재로 변신한다.
애니메이션 <샌드맨>의 감독 폴 베리는 팀 버튼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세트로 작품의 음산하고 몽환적인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기형적으로 일그러진 문, 딥 포커스로 촬영해 원근감이 왜곡된 집안, 그리고 앙각으로 촬영해 등장인물이 주는 중압감을 강조한 카메라 앵글 등은
극중 주인공 샌드맨과 그 피해자인 어린이, 어린이의 어머니들은 모두 인형 제작 전문 프로덕션인 맥키논-선더스사의 작품들이다. 클레이의 유연한 질감과는 달리 섬세한 칼 맛을 느끼게 하는 인형의 모습과 간결하지만 어색함이 거의 없는 동작은 유구한 전통을 가진 유럽 인형 애니메이션의 힘을 느끼게 한다. 여기에 폴 베리 감독은 점프 커트와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적절히 활용해 10분의 짧은 상영시간 동안 관객의 공포심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톰 섬의 비밀모험>이나 <샌드맨>에서 그동안 애니메이션이 기본적으로 가져야할 덕목처럼 여겨왔던 감동이나 행복한 결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이 현실에서 불가능한 세계를 스크린에 실현할 수 있는 '상상의 붓'이라고 할 때, 두 작품은 '상상의 영역'이 얼마나 무한한지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출시:새롬 엔터테인먼트 518-3373)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oldfie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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