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역사상 최고의 오프닝 장면입니다. 시간을 재볼 걸 그랬어요. 한 45초는 될텐데.” 온통 하얀색뿐인 화면을 바라보며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38)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타자기 키 하나가 화면 속으로 쏜살같이 내려와서 부딪혔다. 이제 보니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하얀 것은 다름 아닌 종이였다.
소더버그 감독이 앨런 J 파큘러 감독의 ‘대통령의 음모(All the President’s Men)’를 처음 본 것은 13세 때였다.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파티에 가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명령 때문에 못가고 집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던 날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설득해서 누나와 함께 극장에 갈 수 있었다.
“난 이 영화를 정말 보고 싶었어요. 더스틴 호프먼의 열렬한 팬이었거든요.”
이 때는 그가 영화에 막 맛을 들여가던 참이었다. 그는 마음에 드는 영화가 있으면 몇 번이고 다시 보곤 했다. ‘대통령의 사람들’은 10번쯤 봤다. 그리고 올해 아카데미 상 후보에 오른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와 ‘트래픽’을 만들면서 또 여러 번을 봤다. 두 영화가 모두 진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재미를 추구한 작품이었고, ‘대통령의 음모’야말로 심각한 주제와 재미를 잘 결합시킨 훌륭한 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음모’는 워싱턴포스트지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로버트 레드퍼드가 우드워드 역을 맡았고, 더스틴 호프먼은 번스타인 역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아마도 우드워드가 지하 주차장에서 자신의 은밀한 정보원인 딥 스롯(핼 홀브룩)과 만나는 장면일 것이다. 으스스한 주차장에 우드워드의 발자국 소리가 커다랗게 울린다. 어디에선가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단조롭게 들려온다. 마침내 우드워드 앞쪽의 기둥에 빨간 담뱃불빛이 나타난다. 딥 스롯이다.
딥 스롯의 눈동자에 빛이 반사되자 그는 마치 한밤에 숲속에 숨어 있는 짐승 혹은 흡혈귀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드워드의 얼굴은 좀더 따스한 색의 빛에 감싸여 있다.
“보세요. 레드퍼드에게는 살색의 명암이 나타나 있어요. 하지만 홀브룩의 얼굴은 완전히 단색이죠. 딥 스롯은 인간이 아닌 거예요.”
영화가 끝나자 소더버그 감독은 널리 알려진 얘기를 다룬 이 영화가 왜 그처럼 완벽한 흡인력을 갖는지 설명하려고 했다. 이 영화에 참가한 사람들이 모두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다는 점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뭔가 다른 것, 이를테면 행운 같은 것이 이 영화에 작용하고 있었다.
“이 영화에서는 모든 요소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운이 좋다면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어요. 이런 영화를 만들기를 바라고, 열심히 노력해서 때로 성공을 거두는 거죠.”
(http://www.nytimes.com/2001/02/16/16WATC.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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