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준의 재팬무비]속세를 떠나지 않는 일본 영웅들

  • 입력 2000년 11월 21일 11시 17분


세상에는 영웅도 많습니다. 우리 나라에 홍길동이 있듯 영국에는 로빈 훗이 있고, 스위스에는 윌리엄 텔이, 미국에는 와이어트 어프가 있습니다. 각 나라 영웅들은 나름대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모두들 대단한 능력을 발휘해 힘없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비슷하지만 스타일에서는 많이 차이가 납니다.

중국 영웅들은 사실 속세와는 별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아옹다옹 티격태격 살아가는 속세의 삶일랑 초월한 인물들이 많지요. 현실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악당들을 처치하지만 그런 뒤에는 대부분 속세를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가곤 합니다. 아니면 죽든지.

최근 히트한 <와호장룡>은 전형적인 중국 무협영화라 중국 영웅들이 어떤 인물들인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주인공 리무바이는 수련 도중 '생전 처음으로 느끼는 경지'를 터득하고 중원을 떠나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건에 휘말려 죽어갑니다. <삼국지>의 관우는 전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중국 사람들은 끝내 신선이 된 것으로 믿고 있다지 않습니까.

사실, 영웅들이 일을 해결한 뒤 홀연히 떠나는 것은 세계 어디 영웅들이나 비슷합니다. 하지만 중국은 특히 그런 경향이 더 짙습니다. 도교의 영향이겠지요.

서부의 건맨들을 휘감고 있는 정서는 '고독'입니다. 천상 외롭고 고독한 존재, 그것이 서부의 건맨들이지요. 화목한 가정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카우보이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이런 전통은 현대 액션영화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다이 하드>의 존 매클레인 형사는 카우보이의 전통을 이어받은 전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빌딩 속에 홀로 남아 악당들과 싸우는 고독한 캐릭터지요. 바깥의 파웰 경사와 무전으로 통화할 때 파웰이 "(정체가 탄로 나니)본명을 부를 수는 없고, 자넬 무슨 이름으로 부를까?" 하니까 매클레인 형사가 "로이라고 부르게" 했던 게 기억 나는지요. 로이 로저스는 전설적인 카우보이거든요. 매클레인 형사라는 캐릭터를 어디서 따왔는지 밝혀지는 장면입니다.

또한 카우보이들에게는 영웅답게 여자들이 줄줄 따르지만 악당과의 맞대결을 벌여 처치한 뒤에는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쓸쓸히 떠나갑니다. 중국 영웅들처럼 산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지만 아무튼 어디론가 떠납니다. 뒤로 눈물짓는 아리따운 그녀를 남겨두고. <셰인>의 '아란 랏드'(제대로 표기하자면 '앨런 래드'가 되어야겠지만 옛날에는 이렇게 불렀습니다. 일본식이지요)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일본에는 모모타로(桃太郞)가 있습니다. 복숭아나무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지요. TV 시리즈 <모모타로>는 어릴 때 가장 재밌게 본 사무라이 영화 가운데 한 편입니다.

모모타로는 악당들이 하는 꼴을 두고 보며 참고 참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한밤중 악당들 사는 곳에 가면을 쓰고 나타납니다. 신비로운 음악 소리와 함께 악마 가면에 비단 망토를 뒤집어 쓴 모모타로가 나타나면 악당들은 혼비백산, 벌벌 떨면서 묻습니다. "너, 넌 누구냐?"

그러면 모모타로는 한 바퀴 빙 돌면서 악마 가면과 망토를 싹 벗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또옹똥똥똥, 하는 일본 장구 소리가 요란합니다. 모모타로는 나지막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마치 시를 읊듯 말합니다. "복숭아나무에서 태어난 모모타로, 모모오타로오―" 악당들은 모모타로의 퍼포먼스를 본 뒤 기겁하며 또 묻습니다. "그,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냐?" 모모타로는 더없이 권위적인 목소리로 말합니다. "너희들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도다. 나, 모모타로, 너희들을 용서할 수 없닷!"

물론 악당들은 인정하지 않지요. "그것이 대체 뭔 소리여? 우리가 언제 그런 짓을 했단 말이여?" 그런 뒤 정신을 추스리고 악당답게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라고 이놈아, 넌 지금 혼자여. 우린 오십 명이고…." 모모타로는 긴 말 하기 싫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악당 대장은 그 표정을 보고 발끈,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아그들아, 죽여번지그랏!"

수십 명이나 되는 악당 사무라이들이 칼을 치켜들고 모모타로를 둘러쌉니다. 모모타로는 아직 칼도 뽑지 않은 상태. 그냥 폼만 잡고 있습니다. 악당들이 벌떼처럼 덤벼들면 몇 번 싹싹 피한 뒤에서야 멋진 포즈로 칼을 뽑아들고 악당들을 하나하나 베어 나갑니다.

그 모습은 정말 한 편의 발레를 보는 듯합니다. 칼질 한 번에 두 명씩 쓰러트리는 건 일도 아니어서 모모타로가 몇 바퀴 돌며 칼춤을 추고 나면 어느 샌가 졸개들은 다 죽고 악당 대장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남았습니다. 도망칠 법도 하건만 대장은 대장답게 또는 일본인답게 이른바 '곤조(根性:근성)'를 발휘하여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덤벼들지요. 뭐, 승패야 뻔합니다. 악당 대장은 제법 버텨보지만 끝내 비참하게 죽습니다.

일본 TV 시리즈 영웅들의 특징은 속세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겁니다. 모모타로를 비롯해 '제니가타 헤이지' '하야부사' 같은 사무라이 히어로들은 악당들을 처치하고 나면 다시 생활인으로 돌아갑니다. 마을 사람들과 농담도 하고 제법 장난도 칩니다. 평상시에는 좋은 이웃이다가 급할 때면 영웅으로 변하는,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들인 셈이지요.

산으로 들어가면 시리즈가 끝나야 되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아기를 동반한 무사'처럼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는 캐릭터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멀리 가지는 않지요.

일본 영웅들은 실생활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산으로 들어가 버리는 중국 도사들과 달리,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가는 카우보이들과 달리, 율도국이라는 활빈당만의 이상향을 만들어 그곳으로 가버리는 홍길동과 달리 일본 사무라이들은 끝내 현실 속에 머뭅니다. 일본 사람답지 않습니까?

김유준(영화칼럼리스트) 6609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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