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테마무비]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 입력 2000년 11월 10일 10시 19분


도플갱어(Doppelganger, 살아 있는 사람의 유령이라는 뜻)의 세계관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엔 나와 똑같이 생긴 누군가가 또 한 명 존재한다. 수많은 사람 속에 파묻혀 있는 '나'와 '또 다른 나'는 평생 가야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는 엇갈린 인연의 존재. 하지만 가끔씩 우리는 '그/그녀'를 만날 수 있으며, 그/그녀는 미래 혹은 과거의 내 모습을 하고 나타날 수 있다. 만남의 순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큼은 '직관적으로' 안다. "아... 도플갱어가 나타났구나..."

가장 대표적인 도플갱어 영화인 <도플갱어(Doppelganger)>(93)가 산만한 구성과 왠지 부자연스러운 드류 배리모어의 연기 때문에 불만족스럽다면, 도플갱어 영화의 최고봉인 <베로니카의 이중생활(La Double Vie De Veronique)>(91)이 있다. 제목만 듣는다면, 낮엔 요조숙녀였다가 밤만 되면 거리에서 노닥거리는 여자를 다루는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 류의 영화가 연상되겠지만,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절대 그런 영화가 아니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전형적인 장르영화가 아니기에 오히려 뛰어나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똑같이 생긴 두 명의 여자아이가 한 명은 폴란드(베로니카)에서 한 명은 프랑스(베로니크)에서 태어난다. 외모 이외에도 두 명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음악에 소질이 있으며 심장병을 앓는다. 합창단의 일원인 베로니카는 콘서트 중 독창을 하다가 심장에 무리가 와 쓰러진다. 그녀는 세상을 떠난다. 갑자기 화면은 바뀌고, 이젠 프랑스의 베로니크다. 그녀는 작은 단서들을 통해 자신의 분신이었던 베로니카의 존재를 희미하게 감지한다.

이 영화에서 베로니카와 베로니크는 딱 한 번 만난다. 폴란드의 어느 광장. 시위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관광객인 듯한 베로니크는 버스 안에 있고, 베로니카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하지만 둘을 엮어주는 것은 어느 날 베로니크에게 배달된 카세트테이프나 미묘한 영혼의 떨림 같은 것이다. 마치 산 베로니크가 죽은 베로니카에 느끼는 아련한 감정처럼, 관객 또한 영화를 보면서 운명의 고리에 대한 암시, 인간이란 존재의 신비성, 신의 섭리 같은 것을 조용히 받아들이게 되며, 감독인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형 조종사처럼 우리를 인간 내면의 심원한 경지로 이끌고 간다.

이 영화가 너무 '아트'라고 느낀다면 좀더 장르적인 영화도 있다. <엔젤 하트(Angel Heart)>(87)는 <파우스트>의 누아르 버전이며, 대표적인 '사탄 영화'다. 사립탐정 엔젤은 사이퍼라는 기괴한 인물로부터 쟈니라는 사람들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점점 미궁에 빠지는 사건. 하지만 엔젤의 도플갱어는 자기 안에 있었던 셈인가?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쟈니는 결국 자기 자신이었고, 엔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쟈니라는 정체성으로 수많은 살인을 하고 다녔다.

도플갱어는 액션영화에서도 종종 출몰하곤 하는데 <페이스 오프(Face Off)>(97)는 '얼굴/정체성의 교환'이라는 설정을 통해 기묘한 형태의 도플갱어를 만들어낸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존 트래볼타와 니콜러스 케이지는 상대방의 얼굴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눈앞에 있는 '나 아닌 나'는 감쪽같이 나를 흉내내고 있으며, 나는 나를 포기하고 '나 아닌 나'를 연기해야 한다.

도플갱어의 모티프는 서구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95)는 동명이인(후지이 이츠키)과 1인2역(나카야마 미호)이라는 간단한 장치로 도플갱어의 명 장면을 연출한다. 한 남자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며 서로 편지를 주고 받는 와타나베 히로코와 후지이 이츠키(결국은 같은 배우다). 그들은 영화 속에서 단 한 번 만난다.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있는 후지이 이츠키와 그녀를 바라보는 와타나베 히로코. 분명히 다른 사람이지만 둘은 너무나 닮았다.

숨겨진 도플갱어 영화 한 편을 소개하면서 글을 끝내려고 한다. 마이크 피기스의 성적 고백인 <섹슈얼 이노센스(The Loss of Sexual Innocence)>(99)의 새프런 버로우즈(<딥 블루 씨>에서 상어 밥이 된 그 여자)는 1인2역으로 쌍둥이 역할을 맡는다. 15세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그들은 한 명은 영국으로 입양되고 한 명은 이탈리아에 남는다.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가던 그들은 우연히 한 공간(기차역)에 머물게 되지만 서로를 알아보지는 못한다. 이때 피기스의 카메라는 그들의 엇갈림을 아슬아슬하게 잡아내고, 그들이 끝내 만나지 못함을 확인한다.

도플갱어 이야기를 하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공상 하나. 만약에 길거리에서 내 도플갱어를 만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그 앞으로 뛰어가서 말을 걸어야 할까? 그렇다면 무슨 말을 건네야 하지? "오겡키 데스카, 와타시와 오겡키데스?" 이건 아닌 것 같다.

김형석(영화칼럼리스트) woody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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