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테마무비]부모세대, 당신들의 권위에 대하여

  • 입력 2000년 11월 24일 16시 09분


해방 이후 한국영화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에겐 너무나 부족했던 염색체가 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에겐 저항의 흔적이 없었다. 물론 이유는 있다. 친일정권과 군사독재로 40년 가까이 버텨온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서구의 뉴 시네마에서 목격할 수 있는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을 찾아보기는 힘들 것이다. 영국 뉴 시네마의 대표작인 린제이 와그너의 <만약(If...)>처럼 영화 마지막 부분에 선생들을 모두 기관총으로 쏴 죽이고 'If...'라는 자막으로 영화를 닫는 발칙함이나,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포문을 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처럼 경찰을 희롱하는 대담함은, 아직 '한국영화'에서 불가능한 장면들이다.

기성세대, 즉 부모세대의 권위에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고 그들의 가부장적 체제가 과연 합당한 것인가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사실 청춘영화들이 갖춰야 할 '기본덕목'이다. 그러한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문화'라는 것이 형성되고, 영화 또한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2차 대전 이후 세계영화사에서 영화 매체는 록음악과 함께 그러한 반역의 선두에 있었다. 그런데 왜! 한국만 아직도….

우리 영화계에도 저항의 흔적이 있었는지에 대해 곰곰이 따져가다 보면 한 편의 영화를 만나게 된다. 바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75)이다. 몇몇 삐딱한 부분이 여지없이 검열에 의해 삭제되었던 이 영화는, 당시 대학생들의 청춘 풍속도를 그리는 코미디면서 그 안에 답답한 세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분노를 숨겨놓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주인공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권위적 인물들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신체검사장에서 청년들의 팬티를 벗겨놓고 '현역'과 '면제'를 가늠하는 군의관, 장발을 단속하는 경찰관(하지만 경찰 또한 장발이다), 학생에게 매몰찬 따귀 세례를 던지는 교수, 자식에게 지폐 뭉치나 던져주고 사라지는 아버지 등, 이 영화의 어른들은 모두 젊은이들을 질식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한 명은 자살하고 한 명은 모든 것을 잊으려는 듯 머리 빡빡 깎고 군대에 가 버린다. 이것이 당시 젊은이들의 삶이었고, 저항도 순응도 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청춘들이었다.

80년대는 정말 무서운 시대였다. 조금만 일탈적인 행동을 하면(정권 자체가 일탈적이었지만) '삼청교육대' 같은 곳으로 끌려갔고, 최루탄과 시위가 멎는 날이 없었다. 이 시기 한국영화는 에로티시즘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부모세대에 대한 저항 따위는 관심 없었다. 이럴 때 참으로 희귀한 영화 한 편이 등장한다. 이봉원(개그맨 아님) 감독의 <내일은 뭐 할 거니>(86).

이 영화의 주인공 B(강석현)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다. 그의 어머니는 창녀였고, 4.19 학생운동 당시 도망치던 대학생을 유혹해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B를 낳았다(B의 엄마는 '좋은 씨' 하나 받을 생각이었다). B는 끊임없이 자신의 뿌리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그는 아버지 없는 세대의 아들이었고, '내일은 뭐 할 거니'라는 질문에 아무 답도 못하는 현실 부적응자다. 이 영화는 실험 영화적인 몽환적 분위기를 통해 매우 암시적으로 80년대 청춘들의 허무한 감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후 거의 아무도 부모세대의 정당성에 대해 묻지 않았고, 인정도 부정도 아닌 상태에서 90년대를 맞이한다.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89) 정도가 약간의 문제제기를 했을까? 칠수의 아버지는 미군부대 하우스보이였고, 만수의 아버지는 비전향장기수다. 그들의 가족사는 한국현대사의 질곡과 그대로 겹쳐 있는 셈이다.

하지만 최근, 드디어 21세기가 되어서야, 조금씩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딴지를 거는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봤을지 모르겠지만, <공동경비구역JSA>가 바로 그렇다. 사건을 중재하는 소피(이영애)의 이중적 존재는 어중간한 한국현대사가 낳은 사생아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더욱 묵직한 질문을 숨겨 놓았다. "왜 아버지의 죄 값을 아들이 떠 안아야 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왜 이수혁 병장(이병헌)은 죽어야 하는가?

그 맥락을 밟아나가다 보면, 범인은 마치 영화 속 표 장군처럼 분단체제를 고착화시키고 은근히 즐기는 우리의 아버지들이다. 또한 남과 북의 젊은이들이 화합하여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왜 김일성과 김정일 초상화를 사진 안에 담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했을까? 부모세대의 죄악은 남과 북 공동의 문제다.

그리고 개봉을 앞두고 있는 두 편의 영화가 있다.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 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라는 긴 제목의 영화(12월30일 개봉 예정). 이 영화는 SF 판타지 호러라는 복합 장르 영화면서, 괴물의 형상을 한 교사와 기계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여고생을 통해 노골적으로 선생의 권위에 도전한다.

그리고 또 한 편의 영화. 내년 설에 개봉예정인 임상수 감독의 <눈물>이다. 아이들은 가출했고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폭력과 쌍욕을 퍼붓는다. 하지만 이 영화의 아이들은 그냥 당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주먹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같이 '맞짱' 뜬다. 마치 '로드니 킹 사건'을 연상시키는 경찰 폭력 장면에서 개처럼 두들겨 맞는 그들에게 가부장의 법은 한마디로 '똥'이다. 이젠 우리들에게도 의심의 순간이 왔다. '부모님 사랑해요'라며 아양떠는 귀여운 자녀가 되는 것도 '사회 대화합'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일이지만, 과연 그들이 내세우는 권위가 우리의 자식 세대를 위해서도 계속 간직할만한 유산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김형석(영화칼럼리스트)woodyme@hanmail.net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