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어떤 영화는 독자적으로 진행되는 대등한 이야기들을 동시에 진행시키기도 한다. <트래픽>(2000)은 '마약'이라는 테마를 가운데 놓고 세 가지 이야기를 '튼튼한 삼겹줄'로 연결시킨 영화다. 이 영화의 공간은 크게 세 군데다. 멕시코, 오하이오, 샌디에고.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마약의 '통로'를 캐나간다. 어느 곳에선 마약 단속국 사람들이 범인들을 추적하고 다른 곳에선 벌건 대낮에 가정집에서 십대들이 마약을 주사하며 황홀경을 맛보고 있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직접 카메라를 들고 '마약의 트래픽'을 밟아나가며, 총 135명의 배우들은 크고 작은 배역을 맡아 카메라 앞에 선다. 관객들이 헷갈리지 않겠냐고? 다행히 감독은 세 개의 공간에 각자 고유한 색깔을 입혀(노란색, 푸른색, 자연색) 관객들의 공간감 상실을 막아준다.
이런 류의 영화 중 백미는 단연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숏 컷>(93)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 몇 개를 한데 뭉쳐 3시간이 넘는 영화로 빚어낸 <숏 컷>은 L.A.에 사는 여러 인간군상들이 우연히 마주치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세밀하게 잡아낸다. <숏 컷>이 전해주는 일상의 모습은 일면 섬뜩하기도 하고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는데, 20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이 엮어내는 9개의 에피소드가 하나로 뭉치는 지점은 L.A. 지역을 잠시 뒤흐드는 '지진'이다.
<펄프 픽션>(94)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멀티플 스토리' 중 하나다. 영화 속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여러 공간의 다양한 인물들을 뒤범벅시킨 이 영화는 크게 세 가지 에피소드로 나뉜다. 보스의 정부를 하룻밤 동안 돌보는 갱, 조직을 배신하는 삼류 권투선수, 피 튀기는 살육에 휘말려든 삼류 갱 커플. 도저히 섞일 것 같지 않은 세 개의 이야기는 교묘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뒤엉킨다.
그런 면에서 가이 리치 감독을 타란티노보다 한 수 위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98)는 타란티노 영화보다 훨씬 더 '뒷골목 정서'이며 몇 배는 더 꼬여 있다. 영화 내러티브의 법칙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가이 리치 감독의 장기는 <스내치>(2000, 3월17일 개봉)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다이아몬드 하나를 놓고 열댓 명의 인물들이 몇 개의 그룹을 이뤄 으르렁거리는 형국을 뒤통수치는 상황 설정으로 뜨개질해내는 솜씨는 정말 일품이다.
너무 과격한(?) 영화들만 예로 든 것 같다면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매그놀리아>(99) 같은 영화도 있다. 패트리지 가족과 게이터 가족과 스펙터 가족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는 세 개의 '가족 시네마'를 자잘한 연결 고리로 엮어내고 '텔레비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 소통시킨다. <매그놀리아>가 현대의 가족이 지닌 아픔에 대해 고통스럽게 파고든다면 로렌스 캐스던 감독의 <그랜드 캐년>(91)은 다소 긍정적이다. 사소한 자동차 사고에 의해 백인 중산층과 흑인 하층민, 뒷골목의 어린 갱이 서로 알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 모두를 그랜드 캐년에 모아놓는다. "이런 곳도 있었군." 그들은 자연의 압도적인 위력 앞에서 '공존'의 의미를 깨닫는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선호하는 감독은 홍콩의 왕가위도 있고 한국의 홍상수도 있지만, 여기서 한 편의 '에로 비디오'로 대미를 장식할까 한다. 바로 <모텔 성인장>. 이 영화는 두 개의 모텔 방에서 총 10커플이 빚어내는 '도시 모텔 문화'의 생생한 인류학적 보고서다. 유부남과 유부녀, 나이 많은 여자와 젊은 남자, 사장과 비서, 미혼 남녀...그들 각자의 사연을 패쇄 회로 해부하듯 그대로 '까발리는' 영화.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몰래카메라를 보는 듯한 착각 속에서 흥분보다는 충격의 리얼리티를 경험한다.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 그 허무함을 도저히 글로 전할 수 없음이 아쉽다.
김형석(영화칼럼리스트)woody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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