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공정한 룰에 의한 승부로 규정한다면 프로레슬링은 예외다. 예외를 넘어서 심판을 속이는 반칙 공격에 유혈낭자한 프로레슬링은 문명과 야만의 척도가 되고 만다. 그래도 어쨌든 승부는 난다. 더욱이 스포츠를 ’구경거리’를 찾아헤매는 시대의 짜릿한 볼거리라고 한다면 프로레슬링에 대한 선입관은 버려도 좋을 듯하다. 헐커 호건 시대 이후 한동안 침체되었다가 중흥을 맞고 있는 미국 프로레슬링의 경우, 노회한 조련사 빈스 맥마흔이 주도하는 WWF는 나름대로의 규칙과 타이틀을 걸고 연일 피의 전쟁을 벌인다. 스톤골드, 더 락, 언더테이커 등 WWF의 전사들이 펼치는 지옥의 승부는 각종 메이저 스포츠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국내의 경우 김일 시대 이후를 대표하는 WWA 챔피언 이왕표 역시 침체된 프로레슬링 중흥을 위해 각종 이벤트를 벌이는가 하면 프로레슬링 기술에 동양 전통무예를 합하여 이른바 격기도를 창안하고 그 보급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물론 흥행 이벤트 요소가 강하고 정규 스포츠 뉴스에 전혀 소개되지 않는 종목이지만 과거 압축 경제성장기에 짜릿한 흥분을 제공해주었던 프로레슬링을 좀더 만끽할 수 있는 여건을 회복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닌가.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이 있어 이 주장은 더욱 설득력 있다. 현실의 속박에 짖눌려 가슴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한 은행원이 있다. 의지박약형 인간이다. 그런 그가 어느날 프로레슬링과 조우한다. 레슬러들의 과장된 위악을 대변하는 마스크가 그에게 주어진다. 마스크를 쓴 은행원, 아니 레슬러. 썩 그럴 듯하지 않은가. 이제 은행원은 대낮의 소심한 샐러리맨의 자아를 버리고 화려한 스포츠라이트를 받으며 링 위에 선다.
로프 반동, 헤드록, 그리고 환상의 드롭 킥이 그에게 새 삶의 활력이 된다. 이윽고 운명의 혈전. 절대 강자와의 대결에서 그의 마스크가 벗겨진다. 머리칼이 잘려나간 삼손의 신세.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영화의 마지막, 송강호의 연기가 짜릿하다.
<정윤수·스포츠문화칼럼니스트>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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