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 사각의 링, 생사의 정글. 익숙한 단어들이다. 만화 ‘허리케인 조’나 ‘카멜레온의 시’를 생각한다면 더욱 손쉬운 연상이 된다. 사실인즉 링은 인생의 단면이다. 냉혹한 승부, 처절한 사투, 승패가 선명한 정글의 법칙. 하지만 권투에 대한 이같은 익숙한 연상은 값싼 정서의 과소비로 이어지기 쉽다. 이어령 교수는 은퇴 강연에서 ‘처음으로 장미를 미인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이지만 두 번째로 그렇게 한 사람은 바보’라고 통박했다. 운전면허 시험이나 고시공부는 남들 하는대로 고스란히 노력함으로써 일정한 성과를 얻지만 예술은 다르다. 흉내와 반복은 습작으로 충분하다. 아니 습작조차 우주가 생성된 이래 최초의 세계를 빚는다는 각오가 없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점에서 ‘친구’의 곽경택 감독은 단단히 마음을 다져야 한다. 8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의 감독이지만 그 작품성에 대해서는 왈가왈부가 있었다. 차기작으로 그가 비운의 권투 선수 김득구의 생애를 다룬다고 한다. 혹시 걱정이다. 익숙한 정경이 펼쳐지면 어떻하지? 가난의 설움을 주먹에 실어보내는 비운의 복서 김득구? 물론 사실에 부합하는 연상이지만 성찰없이 이 낯익은 감정의 곡선을 의지한다면 고인의 삶을 남루하게 만들 수도 있다. 물론 기우다. 시나리오를 마무리하고 이제 본격 촬영을 준비한다니 스포츠와 영화의 변증법적 만남, 그 속에 진하게 묻어날 인간적 깊이를 조심스레 기대한다.
짐 쉐리던 감독이라면 참고할 만하다. ‘배창호-안성기’라는 식으로 표현한다면 짐 쉐리던에게 있어 다이엘 데이 루이스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관객에게 직접 전달하는 최선의 메신저다. 두 사람의 이름을 세계 영화계에 알린 ‘나의 왼발’부터가 그렇다. 영국의 강압적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감독과 영국 런던에서 성장한 배우의 만남은 이 영화 한편으로 깊은 우의를 다지게 된다. 아일랜드의 현대사를 정면으로 다룬 다음 작품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의 표본이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사색기를 거친 두 사람은 ‘더 복서’를 통해 20세기의 종착점에서 지난 세기를 성찰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피어린 현장인 벨페스트가 무대. 아일랜드 해방군(IRA)에 대한 의문이 배경에 깔린다. 권투영화이자 정치영화이며 의지의 드라마이자 세상에 대해 맹렬한 어퍼컷을 잠재하고 있는 뜨거운 영화, 곧 ‘더 복서’다.
<정윤수·스포츠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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