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청춘은 소실점을 향해 몸을 던진다. 맹목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름다운 보상없는 아우성과 희생은 오직 청춘의 혈기에서만 뿜어져나온다. 그들은 젊고 순수하다. 그 때문에 간혹 ’순수’에 대한 지나친 동경으로 인해 파국을 자초하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피의 명령이다. 그러므로 어떤 감독이 청춘의 혈기를 그리고자 한다면 일단 그들의 심연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자칫하면 과장과 미화가 잇따르게 되고 그 경우 영화 속의 청춘은 비장비애한 허수아비, 곧 감독의 예술적 자의식의 낭비로 귀결되는 꼴이 된다.
만약 김성수 감독이 ‘비트’만 만들었다면 그는 장르 영화의 테크니션에 머물렀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임순례 감독의 ‘세 친구’에 비하여 ‘비트’는 그 특유의 허장성세로 인해 무척 심심하고 지루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2탄 ‘태양은 없다’가 견실하게 다듬어짐으로써 김성수는 간신히 자기만의 레퍼터리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키타노 다케시는 어떨까. 잡초같은 젊은이들의 혈기방자한 영화 ‘키즈 리턴’. 칸과 베니스의 사랑을 받은 ‘소나티네’(93년)와 ‘하나비’(97년) 사이에 만든 이 청춘 영화는 감독이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을 오간 뒤 문득 깨달은 삶에 대한 성찰이 깔린 96년도 작품이다. 자신의 첫번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키즈 리턴’은 학교와 사회에서 ‘왕따’ 당한 불량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점에서 흔한 설정이다. 그러나 ’하드보일드 로맨티시즘’으로 불리는 키타노 감독의 쓸쓸한 정경과 속으로 삭히는 웃음은 이 영화에서도 짙은 그림자로 깔려 있으며 그 답답한 조건 위에서 두 청춘은 왕따, 야쿠자, 폭력 그리고 권투라는 위압적인 상황들을 직면한다. 허전하고 답답하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거창한 설정은 둘째 치더라도 당장 하루하루의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맹렬하게 부딪치는 두 청춘의 이야기는 역시 키타노다운 허무의 미학을 느끼게 한다.
정윤수/스포츠문화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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