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나의 공간]화가 이정순씨 집

  • 입력 1997년 3월 26일 08시 25분


[고미석기자] 화가 이정순씨의 집(서울 서대문구 대신동)에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진부령 알프스산장에 살던 젊은 시절, 그림공부를 하며 아이들과 오스트리아에 머물렀던 시간,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그의 여정에 끼어든 삶의 동반자들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빈 구석 하나 없이 온 집안에 들어찬 아기자기한 소품들. 가족사진과 오리인형, 커피잔과 촛대, 작은 화분 하나도 각별하지 않은 게 없다. 남이 볼 땐 단순한 무생물이지만 그가 사랑으로 길들이고 숨을 불어넣어준 생명체니까.

『신세대들은 청소가 귀찮다고 자질구레한 것은 모두 치워버리던데 전 그렇지 못해요. 아이들 사진 한 장, 손톱만한 도자기 인형 하나도 다 제 사연이 있는데… 틈 날 때마다 부지런히 닦아주고 이리저리 옮겨놓으면서 추억에 잠겨보는 것도 사는 재미중 하나죠』

이화여대 후문 건너편 「내사랑 알프스」라는 하얀 레스토랑 건물. 아래층은 남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이고 3층이 작업실과 서재, 4층에 살림집이 있다. 3층에 들어서면 라운드 형 서재를 만난다. 짙은 갈색톤, 중후한 클래식 스타일로 꾸며진 방이다.

『남편이 집을 지었어요.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둥근 방이지만 유럽에서 살아서 그런지 이런 스타일에 익숙합니다. 편리하고 실용적이죠』 그는 여기서 글도 쓰고 미대졸업생모임에서 미술사 강의도 한다. 소파 대신 둥글게 의자를 만들었고 책꽂이와 장식장도 짜넣어서 죽은 공간이 없다. 벽에는 그가 미술공부할 때 그린 렘브란트의 모사화가 걸려있을 뿐 장식을 절제해 단아하다.

거실은 좀 다르다. 모든 이에게 자상하고 따뜻한 그의 성품처럼 한번 들어서면 오래 머물고 싶은, 주인의 온기가 느껴지는 공간이다. 흰 레이스로 꾸민 부엌 창가도 예쁘고 장식장에는 컵이면 컵, 같은 종류 물건을 한데 모아놓아 깔끔해 보인다. 『인테리어는 돈만으로 되는게 아니죠. 좀 서툴더라도 내손으로 다듬는 것이 살아있는 공간을 연출하는 방법입니다』

40만부 가까이 나간 자서전 「강한 여자는 수채화처럼 산다」에 이어 그는 곧 다음 책을 펴낼 계획이다. 쓰고 그리는 일만큼이나 살림도 너무 좋다는 그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외출을 자제한다.

물건을 이리저리 옮겨놓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다보면 금세 오전2∼3시가 된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아깝지 않다. 삶과 예술의 구분이 따로 없다.

『오리 하나를 놓아도 물을 담은 접시에 넣으면 호수를 떠다니는 모습이 연상되고 창틀에 올려놓으면 산책나온 오리처럼 보이죠. 그림그리는 것만이 창작은 아니죠. 살림하는 일도 얼마든지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