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와 홍익대 앞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시 걸어야 하는 다리품을 팔아도 밀려오는 해방감에 입이 절로 찢어진다.
나로 말하면 영화광(狂)급은 아니지만 화제작은 놓치기 싫어하는 열렬한 영화 팬 아니던가. 주로 아내와 함께 극장을 찾는 나의 영화보기는 좀 특이한 편이다. 원고 마감이 없는 날 밤에 극장을 찾아 다음날 새벽까지 3, 4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때린다’.
왜냐고. 마감이 끝난 기쁨을 잠으로 때우긴 싫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아일보에서 영화 담당 기자라며 전화를 걸어왔다.
“‘누들누드’의 만화가 양영순씨죠. 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보고 글을 써 줄 수 없습니까.”
내가 엽기니까 엽기를 써달라는 게 요지였다.
천만의 말씀. 같은 부류끼린 서로 할 말이 없는 법이다. 유유상종인 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카메라에 찍히는 것 다 좋은 데 ‘엽기적인 그녀’ 대신 버튼 씨를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다른 사람들이 날 엽기로 봐도 난 ‘배트맨’ ‘가위 손’ ‘화성침공’의 독특한 칼러를 보이는 버튼 씨가 더 좋다. 게다가 아직도 오싹한 기억이 남아 있는 ‘혹성탈출’이라니.
기자의 고민하는 목소리. 이히히. 결국 내가 이겼다. 영화는 원숭이들이 주요 출연자이지만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도 영화 속의 주인공 레오(마크 월버그)처럼 다람쥐 쳇바퀴를 타고 있지 않은가.
영화에서 원숭이의 세상을 지키려고 애쓰는 흉폭한 테드(팀 로스)는 바로 이 혹성의 이상형이다. 테드는 살아 남으려면 테드 형의 원숭이가 되어야 하고 당하지 않으려면 충분히 잔인해져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아직은 파란별, 지구. 이 곳의 지배자는 단순하며 빠르고 무엇이든 먹어 소화시키는 강력한 털 없는 원숭이들이다. 이들의 맥박과 호흡을 따라가기엔 난 너무 나약한 꼬리 없는 원숭이다.
난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지구라는 혹성에 어쩔 수 없이 귀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간밤에 잠을 청하면서 분명히 탈출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나는 이 행성 위에서 숨쉬고 있는 것이다.
버튼 씨의 가장 큰 딜레마는 탈출한 레오가 도착하는 목적지였다. 도대체 레오를 어디로 보낼까. 나 역시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다. 아, 가여운 레오! 결론적으로 그의 이름은 나를 포함한 대다수 지구인들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양영순(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