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내 ‘라이터’는 어디에…

  • 동아일보
  • 입력 2002년 8월 5일 18시 27분


이름은 봉구인데 보통 ‘어리버리 봉구’로 불린다. 오죽했으면 별명이 어리버리냐. 입사원서 내는 족족 떨어지고 제대 5년이 지나도록 백수로 지낸다.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다. 단지 순하고 대가 약해 늘 맞고 살았을 뿐이다. 허우대가 멀쩡해서 특전사에 입대했지만, 모진 훈련을 견딜 수 없어 좀 편하게 취사병으로 지냈다. 아무도 부르지 않은 동창회에 넉살 좋게 갔다가 “인생 그렇게 살지마” 소리를 듣긴 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이 어때서? 착한 사람 살기 팍팍하게 만드는 세상이 잘못 아닌가?
▼청년 백수의 슬픔▼
지난달 개봉된 영화 ‘라이터를 켜라’의 주인공 봉구는 어째 낯설지 않다.
최근 청년 실업이 전체 실업률보다 3∼4배 높은 7%선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한때 X세대라는 화려한 이름으로 대접받던 그들은 그러나 졸업 후 취직이 힘들어지면서 ‘유성(流星)세대’로 꼬리를 내렸다.
어디 젊은 세대뿐이랴. 능력 위주, 미국식 성과주의 인사시스템의 상징인 연봉제를 실시하는 기업이 87%나 된다는 최근의 본보 보도에서 알 수 있듯, 이제 그 조직의 약 20%에 속하는 핵심 인재가 아니면 하루하루 살아남기도 힘들게 됐다. 그나마 손발에 해당하는 70% 안에 끼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다면 상시 퇴출을 각오해야 한다.
잠시 엿본 미국은 당연히 우리보다 더하다.
한 유수한 기업에 사람은 좋되 업무 능력뿐만 아니라 볼링 실력도 떨어지던 직원이 있었다. 팀별 볼링대회를 앞두고 옆자리 백인 동료는 개인 지도를 자청해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얼마 못 가 그 친구는 결국 해고 통보를 받았다. 나중에 볼링 레슨을 해 준 직원이 웃지도 않고 말했다.
“그 자 때문에 오만데서 우리 팀 성적이 떨어지는 걸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젠 속이 시원하다.”
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이 세계화를 외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렇게 되면 온세상의 질좋은 물건을 싸고 쉽게 살 수 있고, 지구촌 사람들이 모두 조화롭게 지내게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올초 멕시코에서 열린 유엔회의에서 고해성사됐듯이,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은 잘사는 나라, 잘난 초국적 기업의 등쌀에 세계화가 본격화된 1989년보다 되레 가난해졌다.
게다가 겪어 보니 우리끼리, 우리 안에서가 아니라 전세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세계화다. ‘성공의 미래’를 쓴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로버트 레이치에 따르면 유능한 사람은 국제적으로 더욱 더 잘 나갈 수밖에 없고, 잘 나가기 위해 더더욱 무한경쟁한다는 게 세계화의 앞날이다.
그럼 봉구처럼 평범하고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어떻게 살라는 말인지, 나는 잠깐씩 고민했고 늘 화가 나 있었다.
그 해답이 될 만한 것을 ‘라이터를 켜라’에서 보았다.
영화 속에서 봉구가 자존심, 인간 봉구만의 그 무엇을 회복하게 되는 게 라이터를 통해서다. 비록 300원짜리 일회용 라이터지만, 조폭 두목에게 뺏긴 그걸 찾기 위해 그는 평생 처음으로 목숨을 건다.
“여기서 못 이기면 넌 평생 낙오자가 되는 거야!”
봉구가 특전사 훈련장에서 바닥을 길 때 조교에게 들었던 소리다. 아이고 도저히 못하겠다, 그때는 돌아섰으나 이번에 그는 끈질기게 엉겨붙어서, 자신만의 능력인 박치기로 조폭두목을 때려눕힌다.
그리고 얼마 후 동창회. 봉구는 이미 취직을 해 있었다. 영화적 낭만이라 해도 좋다. 그의 인생은 달라져 있었던 거다!

미국식 성과주의적 경영이 아무리 문제점을 드러냈대도 능력 위주의 추세,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나만의 무엇을 찾아라▼
다행히도 어떤 일이든, 조직이든, 인간관계에서든, 그것과 나 사이엔 ‘궁합’이라는 게 있다. 여기선 제대로 안 풀렸어도 궁합이 잘맞는 다른 데선 의외로 자기만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게 세상이다.
하지만 궁합 따라 떠돌기에 앞서 해야할 일이 있다. 나만의 ‘라이터’를 찾는 일이다. 아무리 어리버리한 사람에게도 자신만의 그 무엇은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태어났을 이유가 없다. 다만 그걸 찾는 건 스스로 할 일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필자는…▼
동아일보사는 여성의 사회 참여 및 역할이 증대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동아광장’ 필진에 김순덕 논설위원을 포함시킵니다. 김 위원은 창간 82주년을 맞은 동아일보의 첫 여성논설위원입니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83년 입사, 문화부 생활부 기획특집부 등에서 일한 김 위원은 지난 1년간 미국 뉴욕주립대 연수 중 동아닷컴에 ‘김순덕의 뉴욕 일기’를 연재해 독자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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