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반역의 열정

  • 동아일보
  • 입력 2002년 10월 25일 18시 14분


“승진시켜 준다면 상사와 동침하겠습니까?”
맹랑한 질문인가. 황당하고 껄끄럽다면 다른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윗사람한테 잘 보이려고 동료를 헐뜯기도 합니까?” “당신 회사에 심각한 비리가 있다면 언론에 제보하겠나요?”
이쯤 되면 좀 당황스럽다. 착한 나라 바른생활 국민으로서 정답이 뭔지는 알겠는데 정직한 대답을 해야된다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필자가 묻는 질문이 아니다. 영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블룸스베리 출판사에서 직장인들의 도덕성을 알아보기 위해 최근 영국과 미국의 기업 간부들에게 물어본 내용이다. 설문결과는 적이 안심스럽다.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답한 것이다. 그 이름도 우아한 상황 논리다.
▼철새 기질은 누구에게나▼
신문 정치면을 보면 짜증난다는 사람이 많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명분을 들먹이더라도 정치인들이 이리저리 재고 튀는 이유는 단 한가지, 이기는 쪽에 붙겠다는 거다. 정당을 보고 뽑아준 유권자에 대한 배신이라고 암만 흥분해도, 총리 지명자들을 앉혀놓고 도덕성 검증까지 해본 그들은 꿈쩍도 않는다. 한민족 특유의 냄비같은 분노가 다음 선거때까지 계속되리라고 결코 생각지 않는 까닭이다. 사실 맞기는 맞는 말이다. 집단 건망증과 선택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국민들은 자신이 누구를 찍었던가를 잊고 더욱 화를 낸다. 이런 나라에서 자식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느냐고.
그러나 한번 물어보자. 그들이 정말 특별히 부도덕한 집단인가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치인들의 말과 행동은 신문 방송을 통해 낱낱이 노출되는 데다 몇 년마다 한차례씩 그에 따른 승패가 명확히 갈리기 때문에 그 얍삽함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지, 그들이 유난히 반역의 자질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블룸스베리의 설문조사를 우리나라에서 한대도 다른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다. 요컨대 유전자에 주인님은 엄청나게 사악하거나 도덕적이라고 기록돼 있지 않는 한, 사람은 대체로 자기보호적이며 내게 해롭지 않은 범위에서 적당히 박애적이다.
문제는 우리사회의 상황이 너무나 극심하게 요동치기 때문에 남의 언동은 물론 나 자신까지도 예측을 불허한다는 데 있다. 이 작은 나라의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이 세계 1등이다. 빨리빨리와 중단없는 전진, 하면 된다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숨가쁜 경쟁 사회에서 내가 빨리 뭔가 되지 않으면 내 몫을 뺏기고 만다. 누구에게나 반역의 가능성은 있다. 시정 정보를 활용해 땅투기를 해온 시장처럼, 생선가게를 맡는 순간 순식간에 고양이로 변신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때 ‘선수끼리’라는 말이 통했을 때만 해도 게임의 규칙이 존재했다. 반칙을 하면 퇴장당했고 훌륭한 플레이는 박수를 받았다. 물론 세상을 경기장으로 생각지 않았던 순진한 ‘민간인’들은 판판이 지거나 뒷전에 물러나 있는 것이 예사였지만 더러는 인품의 덕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전사(戰士)의 시대다. 실제로 필자가 아는 한 출판사에선 직원들을 선수라고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서로를 전사라고 부른다. 요새 전쟁엔 통제 시스템이 없다. 선제공격이 중요할 뿐. 어떻게든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나 죽은 다음 사필귀정이 무슨 대수랴.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으면 멸망뿐이다. 이길 만한 쪽으로 말을 바꿔타는 것도 나름대로의 전략이다.
이 미친 세상에서 살아가는 길은 개인의 가치관과 능력과 상황에 따라 다를 터이다. 일상의 전쟁이 꼭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돈과 명예 지위 파워에 대한 욕구가 없었다면 인간은 여전히 동굴 속에서 살고 있으리라는 이론도 만만찮다.
▼´어쨌든´ 의 역설적 삶도▼
‘어쨌든(Anyway)’이라는 책을 쓴 켄트 케이스 같은 이는 “사람은 비이성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며 가장 위대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가장 ‘쪼잔한’ 자로 인해 거꾸러질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사람을 사랑하고 위대한 생각을 하라는 게 그의 역설적 삶의 철학이다. 알고도 속는 것과 모르고 당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 착하게 사는 과정에서 오는 자기만족도 상당하다.
어떤 삶을 택할지는 각자에게 달려있되 단, 절대 남 탓 말고 책임은 스스로 질 일이다. 우리들 피 속에 흐르는 그 반역의 열정으로.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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