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평등의 신화를 깨라

  • 동아일보
  • 입력 2002년 11월 8일 17시 56분


영화 ‘아마데우스’를 처음 봤을 때 내가 살리에리인 것 같았다. 열망은 가득한데 능력은 따라가지 못하고, 나보다 뛰어난 자 때문에 괴로워하는 ‘보통사람들의 왕’이 그렇게 절절하게 다가올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다시 보니 느낌이 달랐다. 살리에리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가슴을 쳤다.
모차르트는 천재이고, 천재는 하늘이 인류에게 준 선물이다. 아무리 용을 써도 그 경지에 이를 수 없는 보통사람들은 천재를 인정해주는 대가로 그가 내뿜는 찬란한 천재성을 한껏 누리면 된다. 천재를 질투하고 해코지하는 건 세상에 해를 끼치는 것과 다름없다.
▼사람의 능력은 저마다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모차르트를 살리에리와 같은 교실에 넣고 똑같이 가르치려 든다. 모차르트는 살리에리와는 다른 방법으로 교육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역적 취급받기 십상이다.
최근 마감된 올해 서울의 외국어고 경쟁률이 사상최고를 기록했다. 우수한 학생들만의 특별한 학교, 즉 대학입시에 유리한 명문고이기 때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이번 수능시험에서 재학생들의 학력저하 현상이 두드러졌으니 앞으로 특목고 열기는 더해갈 것이 틀림없다.
이 같은 폭발적 수요를 알아챈 경기도교육청에선 2004년 공립 외국어고 3곳을 열겠다고 밝혔다. 전교조와 몇몇 학부모들은 ‘무분별한’ 특목고 설립이 평준화 제도를 흔들고 공교육을 파탄시킨다며 들고 일어설 태세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고교 평준화제도가 그리도 중요한가. 우리 아이들과 나라의 미래를 희생시킬 만큼.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람의 능력은 다 다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지성 에드워드 윌슨은 “우리는 시간과 의지력만 있으면 어떤 것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하나 한계는 존재한다”고 했다. 내 아이 성적이 나쁜 것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가 아니고,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도 아니며, 교사가 못 가르쳐서도 아니다. 두뇌구조 차이든 환경 탓이든 거기까지가 한계일 가능성이 크다.
지적 능력이 앞선 학생과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 잠자는 학생을 한데 몰아넣고 지식을 쏟아붓는 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교육이다.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31조는 능력차이에 맞춘 적절한 교육을 말하는 것이지, 영웅의 발목을 잡거나 뒤진 자를 깔아뭉개는 획일적 평등을 말하는 게 아니다.
평준화 도입 때의 명분이었던 과도한 사교육비 절감은 헛소리가 됐다. 현재 우리나라 사교육비 지출이 세계 1등이다. 지금 학부모세대가 고교 때는 학교공부만 충실히 해도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었다. 요새는 학교에서 ‘이해찬식 교육’을 하는 탓에 내신과외 수능과외 논술과외, 여기에 경시대회나 심층면접 과외까지 받아야 명문대를 간다. 일류고가 나오면 계층별 위화감이 생긴다는 주장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사람도 있지만, 엄청나게 돈 들여 과외를 해야만 좋은 대학 갈 수 있는 현행입시야말로 계층을 굳혀버리는 제도다.
공교육 질을 높이지도 못했으면서 의무교육기관도 아닌 고교를 평준화, 그것도 하향 평준화로 묶어두는 건 어른들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자식이 상위권이 아닌 학부모는 잘난 내 아이가 2류학교 교복을 입는 게 자존심 상하고, 교사는 수준별로 따로 지도하거나 학교별로 치열한 순위 경쟁을 하는 게 부담스러우며, 정치인과 공무원은 어떻게 바꿔도 욕먹기 마련인 교육제도에 손대고 싶지 않은 거다.
▼누구를 위한 교육인가▼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21세기 국가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유일한 수단이 인재”라고 했다. 고통스러운 고교시절을 거쳐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힘든 판인데 최근 대기업들은 해외에서 핵심인재를 모셔오고 있다. 우리 교육제도가 우리나라를 위한 인재를 길러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고교입시를 전면 부활할 필요는 없다. 다만 더 늦기 전에, 능력에 따라 선택해 수준에 맞는 공부를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다양한 고교와 교실을 마련해야 한다. 모차르트는 모차르트대로, 살리에리는 살리에리대로, 그리고 음치는 또 음치대로 분수껏 삶과 음악을 즐기게 해주는 것이 창당보다 어려운 일인가.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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