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똑바로 차려. 사랑이 밥 먹여 줘?” 지하철역에서 여자가 핸드백으로 남자를 후려치며 악을 쓴다. 남자는 백수다. 데이트하자는 그의 전화를 야근해야 한다며 끊은 여자친구가 직장 선배와 걷는걸 봤다. 눈에서 불꽃이 튄 남자가 여자의 뺨을 때리며 외쳤다. “거짓말하는 것들은 사랑할 자격도 없어!” 여자는 처연하게 말한다. “사랑만 갖고…사랑이 되니….”
▼현실과 이상의 영원한 갈등▼
‘2%부족할 때’라는 이 음료수CF는 젊은 사랑의 풍속도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청년실업은 갈수록 늘고 서울 의대(서울에 있는 대학) 괜찮은 과를 나와도 취업 장수(長修) 대열에 들어서기 일쑤다. 어렵사리 취직한 ‘직딩이’들도 넓고 팍팍한 현실에 부닥치면서 사랑과 순수만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심심풀이 여론조사에선 배우자 선택에 가장 중요한 점으로 ‘성격’을 꼽고 그 다음에야 남자는 여자의 외모, 여자는 남자의 능력을 본다고 답하지만 정작 자기 얘기만 되면 남녀 모두 제일 중시하는 게 경제력이다. 예쁘고 착한 신부감과 소개팅하라는 말에 “뭐 하는 여자인데”라고 물었다가 대학원 다닌다고 하자 “됐다”며 잘랐다는 직장인도 있다. “둘이 합쳐 연봉 5000만원이 안 되면 만날 필요도 없다”는 여자도 없지 않다. 젊은이들의 타산적 사랑을 비판하기는 정말 쉽다. 그러나 사랑이 결혼의 필요조건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건 서양에서도 250년 정도에 불과했다. 요즘 정략적으로 보이는 결혼이 그전엔 되레 정상적이었다. 그냥 따르기만 하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어른들 말씀은 물론 사랑과 결혼에 대해 정통한 학자들은 놀랍게도 서로의 배경부터 가치관까지 엇비슷해야 하는 등 현실에 맞춰야 성공적 결혼을 이어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사랑만 갖고 사랑이 되니’라는 광고문구를 들으며 나는 열흘 후면 새 대통령이 될 노무현 당선자를 떠올렸다. 그의 순수함은 인정한다. 개혁에 대한 열정도 사심이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순수만 갖고 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 세상 어떤 위정자도 자신이 사리사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1989년 처형된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전 생애를 인민을 위해 바쳤다”고 했다.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나라를 파탄으로 몰아넣은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도 4년 전엔 개혁을 들고 나와 압승했다. 부패와 빈곤을 뿌리뽑겠다고 선언했던 그는 무리한 사법개혁안이 입법 사법부의 반대에 부닥치자 국민투표로 이를 통과시켰고 경제개혁을 위해 민간기업까지 정부 통제권 안으로 끌어들였다. 여기까지는 순수한 열정이었다고 치자. 차베스 대통령의 최대 실정은 과거 동지와 측근들을 곳곳에 앉힌 정실인사였다. 기존 정치 경제인들을 부패한 기득권으로 몰았던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만이 개혁을 이룰 수 있다고 믿은 모양이다. 대통령의 충정을 이해 못하는 한심한 언론은 명예훼손으로 피소됐다. 민중을 이롭게 한다는 선심정책과 개혁적 제도는 그러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자신있는 반미노선으로 외국자본은 베네수엘라를 떠난 지 오래다. 대통령하고만 교감하는 무능한 각료들의 비효율적 행정 탓에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만 8.5%나 떨어졌고 국민은 등을 돌렸다. 순수한 사람은 외곬으로 흐르기 쉽다. 적잖은 국민이 노 당선자를 불안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열정만 갖고 개혁이 될까▼
불안의 징후는 인사에서부터 드러난다. 정실인사가 별건가. 지금까지의 실적에 관계없이 사사로운 정이 있고(情) 뜻과 관계가 가까운(實) 사람으로 요직을 채우는 것이 정실인사다. 측근으로 구성된 방미특사단의 아마추어리즘은 벌써 외교 망신으로 드러났다. 민주당 의원은 입각시키지 않겠다던 얼마 전의 말 또한 뒤집어질 조짐이다. 의도가 좋고 열심히 했으므로 결과야 어떻든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학생 때 뿐이다. 아무리 나쁜 사례라도 그 동기는 훌륭한 법이라고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프로는, 더구나 일국의 지도자는 성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국민에게 이롭기만 하다면, 착한 대통령보다는 차라리 교활하리만큼 명철한 대통령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