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武人시대'의 전쟁

  • 동아일보
  • 입력 2003년 3월 28일 18시 49분


“부시가 테러리스트다!”

전쟁반대를 외치며 3000여 군중이 미국계 패스트푸드점으로 몰려든다. 약탈을 할 기세다. 경찰의 경고탄에 물러서면서 그들은 죄 없는 남의 차량에 불을 질렀다.

AFP통신이 전한 26일 레바논 트리폴리의 풍경이다.
“‘무인시대’를 보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도끼가 휙휙 날아가고 철퇴는 탁자를 내려치고.”
KBS 1TV드라마 ‘무인시대’에 푹 빠졌다는 어떤 이는 자기도 하루에도 몇 번씩 도끼를 날린다고 했다. 물론 마음속으로. 예전 ‘태조 왕건’이나 ‘용의 눈물’ 같은 사극이 과거를 오늘의 눈에 비춰보는 역사 재해석으로 관심을 모았다면, ‘무인시대’는 화끈한 폭력 신 덕분에 인기다.
▼내 안에 폭력성이 있다 ▼
반전을 주장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시위대나 화면이 잔인무도해질수록 팬이 많아지는 ‘무인시대’나 모두 내 안에 감춰진 또 다른 나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세계평화를 내걸고 전쟁을 감행한 ‘오만한 제국’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마저 내 속에 들어앉아 있을지 모른다. 이라크전쟁을 화제에 올릴 때마다 화기가 돌면서 흥분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속도 다르지 않다 싶어진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간 내면엔 폭력성이 깊숙이 내장되어 있다고 사회생물학자들은 과학적 연구결과 결론을 내렸다. 더글러스 켄릭이라는 심리학자는 평범한 여자의 80%, 남자의 90%는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죽이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고 했다. 폭력적 TV프로나 컴퓨터게임이 나와서 인간이 더 잔인해졌다고도 할 수 없다. 1996년 ‘사이언스’지에 실린 페르난데스-잘보의 연구를 보면 폭력과 식인의 역사는 최소한 80만년 전까지 올라간다.
전쟁은 폭력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다. 사람들은 항상 평화를 원한다지만 인류 역사는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라 해야 맞다. 미국의 비영리 싱크탱크인 국가방위회의재단의 세계분쟁목록을 보면 2002년만 해도 지구촌 53곳이 피로 물들었다. 모기가 사람 피를 빨아먹는다고 해서 부도덕하다고 비난할 수 없듯, 인간이 전쟁을 하는 것 역시 본성에 따른 일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심지어 적을 죽일 때 엑스터시를 느낀다는 연구도 나와 있다.
전쟁이 옳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전쟁의 참상도 모르지 않는다. 침략에 대한 방어가 아닌 한 어떤 대의명분이 있다 해도 정당한 전쟁이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언젠가 어디선가는 반드시 일어난다. 펠로폰네소스전쟁부터 이번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전쟁까지, 아무리 미사여구를 갖다 붙인대도 전쟁이 터지는 가장 큰 이유는 자국, 특히 더 센 나라의 이익 때문이다. 이건 지난 200년간 251건의 세계분쟁을 연구한 정치학자 브루스 부에노 드 메스퀴타의 결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갈 길은 분명해진다. 나와 싸우면 손해라고 상대가 여기게끔 힘을 키우든지, 어쩔 수 없이 전쟁이 났다면 이기는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이 옳은가를 고민하며 사는 부류와 어떻게 해야 이기는가를 먼저 따지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자에 속한다. 자신이 옳지 않다고 믿는 것을 비폭력적 방법으로 주장하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개인의 가치관과 국가의 정책은 달라야 한다. 어떤 삶을 택하느냐는 순전히 각자의 자유이고, 설령 잘못 살았다 해도 혼자 또는 딸린 식구들과 고생 좀 하면 그만이다. 나라 안에선 그래도 법과 질서와 도덕이 숨쉬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선 힘이 正義 ▼
국가의 경우는 다르다. 국제관계에선 일국의 지도자가 어떤 노선을 걷느냐에 따라 온 국민의 운명이 달라진다. 명분과 의리를 좇아 명나라를 도왔다가 결국 청나라에 패해 백성들의 피눈물을 뽑고, 자신은 청 태종 앞에서 아홉 번씩 땅바닥에 머리를 짓찧으며 항복해야 했던 조선 인조임금을 떠올려 보면 안다. 내 개인적 삶의 가치관을 국가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도 또 다른 폭력이다.
전 세계에 들끓는 반전여론을 받아들여 지금 당장 미국이 이라크에서 철수한다고 치자. 가장 통쾌하게 웃을 사람은 사담 후세인과 북한의 김정일일 것이다. 내 안의 폭력성 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면, 무조건 ‘도덕적으로 올바른’ 반전만을 외칠 일이 아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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