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이라고 배웠다. 교과서에선 전쟁이 나쁜 것이고 평화는 선이었다. 공선사후(公先私後). 공익을 위해 사사로운 이익은 포기하는 게 마땅하다고 했다. 그러나 ‘명분없는 전쟁’에서 미국이 이긴 뒤 사람들은 혼돈스러워하고 있다.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하면서. 짐작은 했었다. 미국이 세계평화를 위해 이라크를 친다고 했을 때, 그게 전부일까 싶기는 했다. 프랑스와 독일 러시아가 이 전쟁을 반대할 때도, 유엔의 승인이 없어서라기보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재편을 용납하지 못하는 유럽의 자존심 때문이 아닐까 했다. ▼추악한 전쟁의 진실 ▼ 결국은 돈이었다. 이제 드러나기 시작한 전쟁의 실상은 어떤 후폭풍보다 추악하다. 유엔 무기사찰단이 이라크에서 열심히 대량살상무기를 찾던 1월, 미국은 이미 딕 체니 부통령이 회장으로 있던 핼리버튼이라는 회사에 이라크 유정 복구권을 줬다는 게 뒤늦게 밝혀졌다. 무기가 나오거나 말거나 미국은 전쟁을 할 속셈이었던 거다. 특혜시비가 일어 이 계약은 중단됐지만, 이번엔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이 사장으로 있었고 최고경영자가 현 대통령 무역자문위원인 벡텔사가 조용히 전후복구 사업을 따냈다. 이들 업체는 집권당의 강력한 돈줄이었다. 정(政)-경(經)-군(軍)복합체가 얼마나 간절히 이라크전을 원해왔는지 이제야 알겠다. 엄청난 복구비용이 이라크 기름을 팔아 충당되는 건 물론이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도 결백하지 않다. 그들이 전쟁을 반대한 큰 이유는 이라크의 주요 채권국이자 석유장사를 도맡아왔기 때문이었다. 영국 더 타임스에 따르면 유엔의 경제제재 하에 진행되는 석유·식량 프로그램은 알고 보니 노다지 장사였고 러시아는 여기서 흘러나오는 돈을 가장 많이 차지했다. 이 프로그램의 주거래은행 소속국인 프랑스는 미국이 승전하자 복구사업의 밥상에 끼어들겠다고 러브콜을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응징을 당할 처지다. 냉혹한 국제정치만 탓할 수도 없다. 정당한 전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도덕의 전당’처럼 보였던 유엔도 결코 깨끗하지 않다는 게 드러나고 있다. 석유·식량 프로그램에서 행정처리비 명목으로 떼어 내는 막대한 커미션이 어떻게 쓰이는가는 극비사항이라고 미국 뉴욕 타임스는 소개했다. 아예 부패와 탈법의 싹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1년 전부터는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석유를 팔아 들여올 수 있는 품목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도록 허용한 덕분에 온갖 호화사치품이 수입돼 사담 후세인 일가와 지배층은 한층 호사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진짜 약탈자인지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제 조상 무덤을 파듯 제 나라 박물관까지 약탈하는 이라크인들을 보며 인간 본성에 대해 절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휘황찬란한 대통령궁에 들어앉아 제나라 백성을 쥐어짜던 후세인이 약탈자인지, 전쟁에 혈안이 됐던 혹은 결사반대를 했던 강대국이 약탈자인지, 아니면 국익 또는 인도주의라는 미명 뒤에서 사익을 좇아온 ‘사회지도층’이 약탈자인지 모르겠다. 반전을 외친 민간인들이 다 순수한 것도 아니다. 할리우드 스타 팀 로빈스나 수전 서랜던은 물론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공개 비난한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도 반미운동 덕에 돈방석에 올라앉았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전하고 있다. 무엇이 선과 악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시대. 우리가 알아버린 건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감춰져 있다는 사실이다. 진실을 파헤친다는 치열한 직업정신을 지닌 언론이 없었으면 세계의 지배계층이 어떻게 나머지 무리들을 속이고 제 잇속만 채우는지 모르고 살 뻔했다. ▼다시 만인에 대한 투쟁인가 ▼ 민주주의도 엘리트 사이에 게임의 룰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가능한 법이라고 쿠웨이트의 사회학자 칼돈 나키브는 말했다. 불행히도 그들이 정한 법칙은 교과서적 정의와 다를 가능성이 크다. 전쟁 전 부시 대통령을 사로잡은 책 ‘전사 정치학’을 쓴 로버트 캐플런에 따르면 오늘을 지배하는 강자의 원칙은 필요와 이기심에 따라 움직이는 극도의 현실주의다. 이제 국가도, 관료도, 기업도,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됐다. 개개인이 전사가 되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이지 않으면 착한 우중(愚衆)으로 묻혀버릴 판이다. 이런 사실을 내 아이에게도 가르쳐야 할까.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