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칼럼]대통령의 '사스'

  • 동아일보
  • 입력 2003년 5월 23일 18시 23분


우리 대통령이 신종 ‘사스(SARS)’를 앓고 있는 것 같다. 세계를 휩쓸고 있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얘기가 아니다. 새로 나온 사스는 중증자산재평가증후군(Severe Asset Restructuring Syndrome)을 말한다. 자신이 금과옥조로 여겨온 가치를 재점검하고 새롭게 조정한다는 의미로 쓰는 신조어다. 쉽게 말해서 ‘또 말을 바꿨다’는 뜻이다.
대통령의 말 바꾸기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전교조에 대한 입장이 왔다갔다 할 때만 해도 한 달쯤 시간이 필요했으나 경호경비 책임자 ‘징계 없다’에서 ‘문책 불가피’까지 오는 데는 이제 반나절도 안 걸린다.
▼지나친 민주화가 민주 해쳐 ▼
모든 상황을 종합 판단한 끝에 내린 통치적 결단으로 이해해야 국민된 도리지만 문제는 이 신종 사스에 적잖은 사람들이 전염됐다는 점에 있다. 언제 또 말이 바뀔지 모르니까, 아니 틀림없이 바뀔 테니까 지금 정부에서 하는 어떤 일도 믿을 수 없다는 ‘의심환자’가 돼버렸다.
석 달 전 새 정부 출범 때만 해도 이 같은 신종 사스를 예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감싸고도는 ‘사회적 약자’들은 이 발병을 은근히 반가워하는 눈치다. 80년대 운동권의 논리로 2000년대의 거리에 나선 그들은 아무리 대통령이 “불법행동 엄단하겠다”고 성을 내도 세게 밀어붙이면 결국 들어준다는 걸 알고 있다.
이 틈에서 사회적 약자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스스로 강자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의심환자들은 각자 끙끙 앓는 중이다. 대통령 말마따나 참여정부가 권력을 찬탈한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 것도 맞다. ‘국민이 대통령’이라는데 노동자가 노동환경의 민주화를 외치는 게 부당하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나라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당장 생계에 지장을 받는 일까지 생겼다. 어찌된 노릇인가.
미국의 저널리스트 패리드 자카리아는 최근 저서 ‘자유의 미래’에서 “지나친 민주주의가 자유를 해친다”고 했다. ‘다수의 폭정’은 시작된 지 오래다. 정치인은 여론조사를 국민의 뜻으로 왜곡하고 정부는 이익단체가 겁나서 할 일을 못한다. 목소리만 크고 책임은 지지 않는 집단이 전체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간과되고 만다.
그럼 민주주의가 나쁘단 말이냐, 하지 말란 말이냐고 논박이 쏟아질 만한 주장이다. 아닌 게 아니라 바로 그런 비판이 두려워 우리나라에서도 다수의 의심환자들이 입을 다물고 산다. 우리가 자유롭게 직접선거를 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쟁취한 게 불과 16년 전인데 자칫 “지나친 민주화 요구가…”했다간 수구 반동 꼴통 보수라는 소리나 듣기 알맞다.
안타깝게도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사이좋은 동반자인 것만은 아니다. 선거에서의 동등한 한 표가 모든 것에서의 동등한 권리로 오해되어서, 나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다 법에 보장된 남의 자유를 뺏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생활에 엄청난 불편을 줄 것이 뻔한데도 세금으로 녹을 받는 공무원들이 노동3권을 요구하는 것이 한 예다.
민주주의만 되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민주적 절차로 뽑혀 민중의 지지를 업은 지도자가 독재자로 변하는 세계사를 보면 착잡해진다. 중요한 것은 다스릴 줄 알고 다스림을 받을 줄도 아는 좋은 정부를 이끄느냐이지, 지도자의 과거와 의도, 순수성은 아무 상관없다.
▼‘법대로’ 적과의 동침을 ▼
참여도 좋고, 열린 정부도 좋고, 아래로의 민주주의도 좋다. 그럼에도 그것이 더 많은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고, 경제를 결딴나게 하고, 차라리 이민가고 싶게 만든다면 의미가 없다.
사기꾼이 아닌 한 자신의 주장은 정당하다고 믿는 게 사람이다. 그러나 사회가 지키고 보호해야 할 자유와 권리는 법에 명시된 것이어야만 한다. 대화와 타협이 전가의 보도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상처를 줄이고 혼란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이회창 전 대통령후보의 캐치프레이즈 ‘법대로!’를 내 편 네 편 따지지 말고 엄정히 적용하는 것뿐이다.
휴가를 떠난 대통령이 신종 사스를 말끔히 고치고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중국의 사스가 그 나라 정치판에 변화를 몰고 온 것 같은 효과가 나타나길 바랄 따름이다. 말 바꾸기 말고, 대선 때 국민을 감동시켰던 진짜 자산으로 돌아가 준다면 더 좋고.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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