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다, 열받는다, 무서워진다, 짜증난다…. 새로 나온 ‘산스(SARNS)’에 걸리면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 신문을 읽고나면 생기는 증세(Severe After Reading Newspaper Syndrome)란다. 대통령 퇴임 100일전에 터진대도 경악스러울 의혹이 취임 100일 만에 신문마다 새까맣게 발라지면서 사스까지 막아내는 모양이다. 다행히 산스엔 효과만점 백신이 존재한다. 한 주부가 미소를 머금고 말해줬다. “오마이뉴스를 보세요.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편안해져요. 스포츠지도 괜찮죠.” 더 획기적인 특효약이 있다. 인터넷에서 청와대브리핑을 보면 된다. 어쩌면 그렇게 국정이 매끄럽게 돌아가고 우리정부는 그리도 완벽한지 흐뭇해질 정도다. ▼괜찮다, 다 괜찮다 ▼ 눈과 귀 가진 사람들이 입을 모아 걱정하는 대통령의 변화무쌍한 발언과 정책에 대해 청와대브리핑은 “변한 게 없다.…대통령은 험난한 정치역정에서도 신념과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고 명쾌하게 단언했다. 문화관광부 장관도 ‘언론이 대통령 리더십을 근거 없이 공격한다’며 언론정책 짜내는 데 부심하지 말고 청와대브리핑과 몇몇 백신 매체를 집집마다 뿌린다면 우리나라는 단박에 명랑사회가 될 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도무지 문제될 것이 없다. 무슨 땅을 어째 이상하게 사고판 대통령 전 후원회장에 대해 대통령이 “제가 대통령만 되지 않았어도 부도덕자로 매도되지 않았을 분”이라는데 더 이상 의혹을 가지면 가진 쪽이 부도덕자가 될 것 같다. 안타깝게도 세상 모든 집권자는 자신이 국가를 위해 열심히 잘하고 있다고 믿는 속성이 있다. 이같은 속성은 통치자와 그 주변까지 흥분시키는 권력의 마력 때문이라는 게 미국 정치학자이자 철학자인 해나 아렌트의 설명이다. 자신이 하는 일은 전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권력자의 신념으로 인해 공인으로서의 역할과 개인으로서의 이해관계를 구분 못하는 현상이 빚어진다. 잘 아는 사람을 봐주는 연고자 등용(nepotism)이나 코드가 맞는 집단에 의존한 패거리주의(cronyism)도 국익에 대한 고려에서 비롯된 충정이라고 권력자는 확신한다. 부패라는 것이 바로 이런 권력의 속성 탓에 생겨난다고 새뮤얼 헌팅턴은 진작에 갈파했다. 부패는 모든 사회에 존재한다. 권력과 위세를 남용해 얻은 이득은 결국 돈으로 귀착된다. 정부에서 말을 몇 번 뒤집기는 했지만 그래도 ‘위법은 없다’는 그 땅에 대해 의구심이 풀리지 않는 것도 권력과 부패의 숙명적 사슬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심란해할 것도 없다. 세계를 둘러보면 권력층의 부패란 거의 일상사다. 이탈리아는 최고 갑부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노골적 부패로 피소돼 재판을 받는데도 여전히 평화롭다. 한때 “부패를 뿌리뽑겠다”고 부르짖던 리펑 전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장의 부인과 아들딸이 거대기업을 경영하며 부당이권을 누리고 있어도 중국은 조용하다. 지난달 열린 반부패 세계포럼에선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면 부패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되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론도 발표됐다. 정치인들이 유권자와 이익집단에 더 많이 신경쓰는 까닭이다. 썩은 독재자를 몰아내도 새 지도자가 더 고약한 도적으로 판명되는 국가가 수두룩하다. 권력 근처에 못 가면 바보이고 먹다 걸리면 재수 없는 거라고 여긴다. 위에서 깨끗한 척하며 개혁을 외치는 게 아니꼬울 뿐. ▼‘호의적 부패’의 시작인가 ▼ 중국의 한 관리는 “부패는 감기 같은 것”이라며 나으면 또 걸린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전직 대통령 측근들이 줄줄이 엮여가는 꼴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감기를 평생, 대대손손 달고 살 수는 없다. 감기 기운이 느껴질 때 잡아서 하루라도 살맛나게 살아야 한다. 병도 내 몸에 병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치료가 가능해진다. 눈 밝은 사람들이 재촉할 때 검사를 받아보는 게 큰 병 키우지 않는 길이고, 이 역할은 다름 아닌 언론이 하고 있다. 산스로 고통받는 것이 백치처럼 사는 것보다 낫다. 나에겐 절대 문제가 없다는 ‘무오류성의 오류’에 빠져있는 한 죽을 때까지 병은 고쳐지지 않는다. 특히 최고 권력자가 추상같은 의지로 나서지 않는다면 어떤 법과 제도가 마련되더라도 부패는 결코 없어질 수 없다. 대통령의 ‘호의적 상황인식’에 마냥 명랑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순덕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