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층의 보수정당과 깨끗한 진보정당, 제 살길만 찾는 보수세력, ‘코드’와 ‘386’을 새 정부 흔들기에 악용하는 보수언론…. 몇몇 매체에 등장하는 이런 표현을 보면 가슴이 덜컥한다. 전후 문맥과 글쓴이의 의도로 볼 때 보수는 영락없는 악(惡)이다. ‘보수 신문’에서 일하는 나는 악의 하수인쯤 되는 셈이다. 대한매일 최근 조사에선 자신이 보수라는 국민이 39.8%로 제일 많던데 이들 역시 악의 무리인지 묻고 싶어진다. ▼이데올로기는 詐欺다 ▼ 이념으로 선악을 가른다면 나는 어디에도 끼기 힘들다. 우선 어떤 아름다운 이름이 붙었어도 ‘무슨무슨 주의’라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란 결국 특정집단의 필요와 이익을 위한 것일진대 이걸 통해 이상향에 닿을 수 있다고도 안믿는다. 자기 신념을 남에게 강요하는 캠페인이나, 의견이 다르다고 적으로 모는 사상검열은 끔찍하다. 극심한 이념대립으로 찢겼던 1945년 8월의 해방 공간으로 돌아간 것 같다. 대통령이 “시장을 지배하는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된다”고 한 말에 일각에선 반노(反勞) 친(親)재벌로 돌변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진보에서 보수로 돌아섰다는 배신감에 대정부투쟁을 선언한 집단도 생겼다. 세계는 어떻게든 나라경제를 살리려 애쓰는데 우리만 허깨비와 씨름하느라 뒷걸음치는 형국이다. 20세기를 제패한, 그리고 21세기도 지배할 것으로 보이는 이념이 있다면 자본주의다. 시장경제를 핵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보수주의라 할 수 있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졌다지만 그건 잘사는 사람이 너무나 잘살게 됐기 때문이지 전반적 생활수준은 분명 높아졌다. 역사를 돌아보면 나눠먹을 파이가 충분하거나 충분하리라는 희망이 있을 때 평등과 분배를 중시하는 좌파가 득세했다. 파이가 작아지면 사람들은 경쟁과 성장을 앞세우는 우파를 환영했다. 1968년 유럽의 68혁명은 한동안 좌파의 몰락과 보수주의 부활을 몰고 온 분수령이었다. 그때까지 세상을 휩쓸던 좌파는 모두가 힘을 합치면 원하는 걸 나눠 가질 수 있다고 선전했다. 안타깝게도 반토막 정도 주어진 파이는 결코 커지지 않았고, 선거에서 이기려면 자유시장정책을 내세워야 한다는 건 정치인들이 더 잘 알았다. 마거릿 대처가 “정치는 무엇을 잘못했나”를 연설한 것도 이 해였다. 비슷한 현상이 오늘날 나타난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개방과 규제완화 등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펴는 보수주의의 화신이다. 내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이 너무 왼쪽으로 나가면 필패하리라는 우려가 당 안팎에서 나돈다. ‘해리 포터’조차 사회 위계질서 등을 강조하며 보수성을 전파한다는 비평이 나올 정도다. ‘제3의 길’을 내걸었던 영국 노동당 정부는 물론 고루 잘사는 사회를 추구해 온 프랑스 독일 등도 강성노조를 꺾고 세금을 깎는 등 신자유주의로 돌아섰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환상적 복지정책을 펴온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선 지나친 사회적 배려가 실업을 부추길 뿐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자성이 일고 있다. 이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보수냐 진보냐는 의미가 없다. 미국의 지난 대선 캠페인 때 공화당이 의료 교육 복지 등 민주당 전매공약을 선점한 게 승리의 큰 요인이 됐듯, 제 국민을 어떻게 잘살게 할 거냐가 중요할 뿐이다. 꿈은 개인이 좇을 일이고 국가는 법과 시스템으로 이를 지원하면 충분하다. “정부가 꿈과 통치를 결합시키면 전제정치가 된다”고 영국의 철학자 마이클 오키숏은 일갈했다. ▼이념논쟁보다 중요한 것 ▼ 지금 ‘권력을 가진 시장’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세계를 누비고 있다. 낭만적 민족주의에 젖은 우리가 영어 조기교육이 좋으냐 나쁘냐에 매달리는 동안, 영어가 ‘되는’ 인도인들은 다국적기업의 열매를 나눠먹는 중이다. 우리가 껍데기나 다름없는 노사모델을 찾는 데 골몰할 때, 노사분쟁 없는 남의 나라 노동자들은 이미 봉급받고 일하는 기쁨을 맛보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도 출제된 채만식의 단편 ‘역로’엔 이념을 놓고 입씨름하는 농민과 월급쟁이, 민생보다 권력투쟁에 관심 쏟는 정치인이 등장한다. 수험생이 반드시 외워야 하는 작품 주제는 ‘해방 직후의 혼란스러운 사회상’이다. 현실은 그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세계는 이념과 결별했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해방 정국의 혼돈’ 속에 살아야 하는가.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